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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창의(關東倡義) 대장 민긍호(閔肯鎬)는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치봉(閔致鳳)과 모친 원주원씨(元氏) 사이에 고종 을축년(乙丑年:1865) 서울에서 태어났다. 민긍호 의병대장은 1897년 진위대(鎭衛隊)에 입대 1900년에는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의 정교(正校:지금의 상사)로 근무하였으며 1901년 특무정교(特務正校:지금의 원사)로 발탁,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될 때까지 원주진위대에서 근무에 충실하였다. 1907년 8월 10일은 원주진위대 해산 예정일이었는데 민긍호 의병대장이 이를 미리 알고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의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홍유형이 여주로 도망하자, 봉기에 동참한 민초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지급하고 의병대를 편성, 그해 8월 5일 오후 2시에 봉기하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온 충주수비대를 쫓아내고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그 후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온 서울주재 일본군사령부 소속 보병 제47연대 3대대와도 끝까지 싸웠다. 민긍호 의병대는 강원도·충청도·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李康年), 윤기영(尹起榮) 등을 비롯하여 횡성·충주·원주·여주·고성 등의 지역에서 100여 차례 일본군과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1907년 관동창의대장이 되어 2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 삼산리 전투와 처현동 전투, 국전리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1907년 추운 겨울철이 되자 일본군은 의병대에 반격과 토벌을 강화하였다. 이에 민긍호 의병대장은 의병대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50~60명씩 분산시켜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하였으며 1908년 2월 27일 오전 11시 강림(講林:원래 각림(覺林)이라 불렀음. 당시 영월군 수주면) 박달치 부근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월현리 등 자치로부터 10여 리 지점에 있는 궐덕리(지금의 고비덕)에서 숙영하였는데, 일본군과 경찰대는 이 정보를 탐지하고 2월 29일 11시 궐덕리를 동~남 양방면으로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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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 의병대는 궐덕리 남방고지에서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3시간 30분 만에 탄환이 떨어져 전세가 기울자 민긍호 대장은 민초들과 의병대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과 경찰대에 스스로 체포되어 원주에 있는 일본수비대로 압송되는 도중에 강림5리 창말마을에서 하루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날밤 의병대 60여명이 민긍호 대장을 구출하기 위해서 박달치 동북방으로부터 일본군을 습격 "민긍호 대장은 어디에 있는지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라"고 크게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 민긍호 의병대장이 포박된 채 탈출을 시도하자 다급해진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 이렇게 민긍호 의병대장은 1908년 2월 29일 43세의 나이에 장렬한 일생을 마치고 전사 순국한 것이다. 특히 강원도 선유사인 홍우석(洪祐晳)이 민긍호 의병대장 회유를 위해 5개조의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그 요구를 거절할 시 체포하고자 밤중에 민긍호 의병대장과 회동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긍호 의병대장은 이를 눈치채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회유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강원도 관찰사 황철(黃鐵)이 직접 횡성군수를 시켜 귀순 권고에 나섰으나 이 또한 단호히 거절하고 죽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권을 빼앗기고 국민이 도탄에 빠져있는 때에 내가 일본에 투항하면 일본 치하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부귀가 역적(逆賊)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의 뜻은 나라를 찾는데 있으므로 강한 도적 왜(倭)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 속에 묻히지 못하고 영혼이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돌게 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며 민긍호 의병대장은 의연히 통박하면서 일본군과 대적하여 싸웠다. 1954년 원주 봉산동 중턱에 충혼탑을 세워 민긍호 의병대장 넋을 기리게 되었으며,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강림면민 모두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지를 확고히 하는데 디딤돌이 되어준 민긍호 관동창의대장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심과 백의민족의 정체성을 전해주기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오늘 이 탑을 세운다. 2004년 11월 12일 강림면민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