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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는데 이를 제3차 의병 또는 정미의병이라 부른다. 이전의 을미의병이나 병오의병이 대체로 노장층의 유림지도자가 중심이었는데 비하여 정미의병은 해산된 구한국군대가 중심이 된 것으로서 군사에 밝은 청년들이 앞장을 서는 의병이었기 때문에 왜병의 피해도 전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그런데 정미의병은 원주 진위군사가 특부정교 민긍호를 중심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나 왜병과 전투를 벌인 후 전국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이때에 선생은 32세의 청년으로 이웃고을에서 의병이 일어남을 보고 자신도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의병 200여 명을 모아 저평, 홍천, 원주, 평창, 영월 등지에서 적을 공격하여 다수의 왜병을 죽이고 무기와 탄약등을 노획하였는데 왜적과의 교전이 수백 회이며 군사가 많을 때에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무신 1908년 2월에는 홍천에서 왜군대군과 크게 접전을 벌여 이를 격퇴시키니 이에 분노한 일제는 4월 2일에 횡성의 수비대를 파견하여 홍천군 월운리 서북후동에 은거하던 선생의 가족을 납치하여 놓고 선생에게 귀순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다하였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달 20일에 부하를 거느리고 횡성읍을 습격하여 왜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일제의 계획적인 대진압작전으로 의병의 피해가 커지면서 정미의병은 점차로 해산하게 되었다. 경술국치 후 선생은 국내에서 항일투쟁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3.1운동 다음해인 경신 1920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힘을 합하고 대한의용부참모로 활약하였으며 병인 1926년 2월에는 대한독립단 참모로 취임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그해 9월 19일에 민족진영의 분열과 그들의 주도권장악을 노린 좌익단체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선생의 시신은 동지들이 만주 길림성 혼춘현 산채강에 권조하고 아직도 독립된 고국에 환장하지 못하여 그 혼백이 만리타국에 머물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 하겠다. 선생의 배는 밀양박씨이며 계자 정희와 1녀를 두었고 정희는 재진 재화 재욱 3남과 3녀를 두었으며 재진은 영호 장호 경호 3남과 1녀를 두고 재화는 4녀를 두고 재욱은 아들 창호와 1녀를 두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애국정신과 항일투쟁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계묘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