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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림의 통합 김창숙은 유진태의 소개로 이득년(李得年)의 집에서 우연히 임경호(林敬鎬)를 만나게 되었는 데 임경호는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의 문인이다. 김복한은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킨 바도 있었고 이완용 등 매국적 을 규탄하는 글을 상소하였다가 옥고를 겪은 바 있는 기호(畿湖) 유림의 영수였다. 영남유림들의 경우와 같은 동기 및 목적에서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 ·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欀鎭)· 최중식(崔中軾) 등 17명의 연서로 된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그 발송을 임경호에게 부탁하였고 임경호는 같은 문인인 황일성(黃佾性)·이영규(李永珪)·전용학(田溶學) 등과 함께 발송을 예의 준비 중에 있었다. 유진태는 김창숙에게 임경호를 소개하면서 “서로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같은 취지와 같은 목적으로 된 독립청원서를 휴대 한 양 대표가 우연히 자리를 같이하게 된 것은 기연이라” 강조하였다. 두 대표는 서로 손을 잡고 공동행동에 합의한 후 유선 양측 문면부터 검토하기 시작 하였다 . 기호의 문면도 그 내용은 대 체로 영남본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영남본이 보다 간명하여 영남본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서명자의 명단은 양쪽의 구별이 없이 혼합하여 열기하기로 하였는데 서명자는 모두 137인이었다. 그리고 파리에 파견할 대 표지명에 있어서는 임경호의 자 발적인 제의로써 김창숙이 혼자 맡기로 하였다. 이로써 3백여 년간 서로 반목하던 파벌과 당파색을 초월하여 국가의 독립이란 대의 앞에서 전국유림의 대동단결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제2절 장도에 오르는 실정과 수난 1. 떠나는 과정과 장서 발송 다른 준비는 거진 되었으나 조속한 출발을 위하여 구체적인 준비는 쉬운일이 아니었다. 파 견대표로는 김창숙을 수석으로 하고 이덕현(李德鉉)을 차석으로 정하였으나 활동무대가 중국인 만큼 중국어에 능통하면서 도 독립정신이 투철한 자의 통 역이 필요 하였다. 물색한 결과 박돈서(朴敦緖)를 동반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에 가면 우 리나라 혁명지도자로 현재 상해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동녕·이동휘·이회영·이시영·조성환·김규식·신채호·박은식·조완구 등 인사들에게 먼저 김창숙에 대 한 소개장을 발송하도록 유진태·이득년·조중헌(趙重憲)·이정수(李貞秀)·윤중수(尹中洙)등이 그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그다음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문헌과 그동안 모금한 다액의 현찰을 자신이 휴대한다는 것 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것을 비밀리에 중국대사관에 연락하여 서울에 있는 중국인 명의로 봉천까지 철도편으로 택송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 도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모으고 그동안 각방면으로 물색한 결과 중국대사관의 직원인 장관군(張冠軍)의 주선으로 서울 에 있는 중국상인 동순태(東順泰) 본점을 통하여 봉천에 있는 그의 분점에 택송하기로 결 정하고 장관군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하물(荷物)과 함께 보내겠다는 약속을 얻었다. 이로써 일체의 여장은 장관군을 통하여 택송하였다. 약속한대로 이덕현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서 김창숙은 박돈서(朴敦緖)만을 대동하고 먼저 출 발하기로 하고 시일은 3월 23 일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3월 23일 봉천행 기차에 올라 다음날 안동현에 도착하여 옛 친 우 박광(朴洸)을 만나 국내외의 긴밀한 연락을 부탁하고 다시 차창에 의지하여 봉천에 도착, 중국인에게 부탁한 하물을 무 사히 찾아 가지고 봉천 서탑(西 塔)에 들려 이호연(李浩然)을 만나 내외의 근황을 듣고 3월28일 상해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 마침내 이동녕·조성환·이시영·신규식·조완구·신채호·손진형(孫普衡)등을 만나 활동 상황과 국 제정세를 자세히 듣고 국내실 정을 말한 뒤에 파리로 갈 계획을 의논하였다. 신규식·신채호·이동녕 등 여러 동지들과 의견 교환한 결과 파리행은 여건이 미비하다는(여 비 15만원이 필요하고 프랑스어 통역도 필요) 동지들의 권고를 받아 들여, 이미 파리에 주재하고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독립청원서를 직접평화회의에 제출키로 결정하고 청원서 원문을 영·독·불·중 등 4개국어로 번역하여 수천부를 인쇄하였다 . 김규식에게 부탁한 외에 세계 각기관 언론계 그리고 국내 각지 향교에는 원문 그대로 직접 우송하였다. 이로써 국내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국내는 물론이어니와 국제적으로도 한국 유림단의 거사가 대대적으로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