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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명활동과 장서의 문안 이때부터 각자는 손이 닿는대로 동지 규합에 전력한 결과 3월 4일에는 유림계의 유망한 인 사들이 다수 포섭되었다. 이날 성태영 집에서 그동안 동조자들이 자리를 같이하면서 지방 유림들에 대한 동원 대책을 논의 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역별로 분담하기로 하고 3월 15일경에 다시 서울에서 모임을 갖도록 약속하였다. 이중업(李中業)은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길정호는 충청남도를, 성태영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 유준근(柳濬根)은 전라남북도 를, 윤중수(尹中洙)는 함경남북도를, 김창숙은 경상남북도를, 유진태는 평안남북도를, 각각 담당케 하고 즉시 행동을 개시 하기로 하였다. 한편 김창숙은 곽윤과 김황을 찾아가 곽종석에게 독립청원서의 문안 작성을 요청하는 일과 그 동안의 경과 보고가 시급하 니 그대들이 거창으로 내려가면 자신도 성주를 다녀서 곧 뒤쫓아 가겠다고 약속하고 곽윤과 김황은 거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때는 3·1운동 직후로서 전국 각 지방에서는 만세소리가 그칠 날이 없고 곳곳에서 학살·투옥·도피 등 수라장이 되 는 한편 일본 헌병들은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와 경계가 삼엄하였다. 김창숙은 3월 8일 서울을 떠나 성주 본가에 이르니 그 모친의 병환은 여전하였다. 그 다음 날 곽종석을 찾아갔다. 곽종석은 반갑게 맞으면서 “이제 전국 유림을 일으켜 우리의 대의를 세계 만방에 천명케 되었으니 곧 이몸이 죽을 곳을 얻은(死得其所) 것이라 하고 독립청원서 문안을 효당 장석영(張錫英)에게 이미 작성을 부탁 하였으니 거기에 가서 찾으라” 하였다. 김창숙은 그 길로 장석영을 찾아가지 않고 김천을 거쳐 영주(榮州)에 도착하여 이 교인(李敎仁)·김교림(金敎林) 등 을 만났다. 김창숙의 돌연한 여정의 변경은 자기가 담당한 유림들의 서명도 중하지만 자금 조달이 시급한 문제였다. 이 거 사 관계로 해외에 갖고 간 자금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김창숙은 해저( 海底)·유곡(酉谷) 등지를 역방하 고 안동방면의 용무는 봉화유림들에게 부탁한 뒤 장석영을 만나기 위하여 다시 성주로 향하 였다. 장석영은 영남에서 손꼽 히는 큰 선비였다. 문안을 요구했다. 장석영은 “문안 원문은 이미 곽종석에게 참고로 보냈 다.”하면서 사본 1통을 내어준 다. 김창숙은 그 문안을 읽어 보니 약간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나 앞으로 곽종석과 상의할 것을 생각하고 다시 거창으로 향하였다. 김창숙을 만난 곽종석은 “일전에 장석영으로부터 보내온 문안을 보고 그대가 다시 찾아올 것을 생각하며 내가 별도로 집 필한 것이 있다.” 하면서 그 초고를 내어 준다. 이를 받아 보니 그 내용이 심히 해괄간명( 該括蕑明)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 작성된 것이 현재의 파리장서이다. 곽종석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막중한 국사를 맡겨 왜적의 삼엄한 경계에서 기약도 없이 만리이역으로 떠나 보내는 작별의 순간인지라 만일을 염려하여 심중 주도하였다. 김 창숙으로 하여금 독립청원서를 외우게 하고 곽윤을 불러서 청원서를 별도로 붓으로 쓰게 하여 그것으로써 신총(新總)을 만들어 미투리한 겨례를 준비하 도록 분부하고 또 부탁하기를 “중국에 가서 우리나라 혁명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겠지 만 중국 정부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중국학계의 석학이며 참의원의원인 이문치(李文治) 를 만나 보라. 그분은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손일선(孫逸仙)을 움직여 줄 것이다. 이문치는 몇해 전에 나를 찾아와서 나와 기거를 같이 하면서 여러 달 동안 정치·사회·문학 등 흉금을 털어 놓고 사귄 친구이다”하였다. 김창숙은 그후 이문치 를 통하여 중국 정부로부터 많 은 협조를 받은 바 있었다. 그는 또 끝으로 “이번 거사는 모험을 각오한 일대 장거인 만큼 단신보다는 그대의 협조자 가 필요하니 이현덕(李鉉德)을 동반하는 것이 그대의 의향에 어떠한가?” 김창숙은 쾌히 승락하는 한편 이현덕(李鉉德)과 불일간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 하였다. 그날밤 10시경에 청년한 사람이 황급히 들어 와서 『일본 헌병들이 김창숙을 찾고 있으니 속히 피하라”한다. 김창숙은 즉시 그 사람의 안내로 이웃 집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그 이튿날 아침 일짜기 서울 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서일본 헌병의 수사망에 쫓겨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서울에 도 착하니 김정호는 김창숙을 기다 리다 못해 성주로 찾아 내려 갔다는 것이다. 김창숙은 그 다음날(15일) 각 지방으로부터 돌아온 윤중수(尹中洙)·성태영·유준근·이중업(李 中業)·유진태 등과 함께 성태영 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각 지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앞으로 추진할 대책을 협의한 바 있었다. 날이 갈수록 일본 헌병의 경계가 심각하여 일보도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이 이구동성으로 말 하는 공통된 체험론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시일을 천연한다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위험을 기다리는 결과가 되는것 이니 국내 활동은 여기서 중지 하고 파리행 출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