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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警駭(경해)케 하였다. 귀국 후 민족지 동아일보의 주간 겸 주필로 諤諤(악악)의 논전을 편 것이 26세 때이다. 筆戰(필전) 5년 후 미국에 유학 오레곤 대학 신문학과와 컬럼비아 대학 정치과를 마치어 석사 학위를 얻고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서 런던 대학에서 螢雪(형설)의 공을 ○은 결과 “뿌리티쉬.메도드.어브.인더스트리얼피-스“라는 논문으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의 학위를 받었으니 미영 유학이 범 13년이었다. 귀국 후 보성전문 교수로 후진을 양성 중에 1945년 8.15 광복을 맞으니 그 심오 해박한 국제지식은 일세의 지도자이었다. 38선으로 양단된 조국과 세력 각축의 미소공위 개회 중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으로 심혈을 경주하여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1947년 12월 2일 저녁 7시 제기동 자택에서 흉탄에 우해하니 향년 54세이었다. 친우로는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와 善(선)하였다. 중형 덕준은 1921년 琿春(혼춘)사변 취재 중 일군에게 피살되고 그 후 백형 덕주는 일경의 고문으로 치사하고 아우 덕진은 상해에서 독립운동비 조달 중 피살되니 일문 4형제가 모두 나라 일에 순국한 것은 사상 희유의 일이다. 부인 박예헌 목사 장녀 은혜 여사와의 사이에 화원 사원의 두 아들과 숙원 혜원의 두 딸이 있고 누이 덕선이 있다. 공은 조국애의 정열이 배인하되 세심두도하여 옆의 사람이 그 심천을 엿보기 어렵고 인을 대함에 화기가 넘치면서도 대의를 위하여서는 용감하였다. 國(국)이 難(난)하매 현상 賢相을 생각하기 간절할 때 공을 흉탄에 잃으니 아! 어찌 天道(천도) 무심하다 하지 안으랴. 공의 묘는 정당사회연합회장으로 망우리에 안장되였다. 1966년 1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