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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본관은 남평문씨 족보에 적힌 이름은 명회 자는 일평 호는 호암인데 虎巖(호암)으로도 쓰고 湖岩(호암)으로도 썼다. 불우한 세대를 짧게 살면서 큰 뜻을 세웠기로 그 그늘을 오늘에 길게 드리우고 여기 고히 잠들고 계시다. 1888년 5월 15일 평안도 의주에서 한학자 천두공과 해주이씨 사이에 태어나 조국이 광복되기 전인 1939년 서울 내자동 백송이 자라던 담 너머 집에서 숨을 돌리시니 나이 52세로 긴 뜻을 담기에는 너무 짧은 생애였다. 얼굴에 비해 눈이 큰 편이였으며 항상 한복에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담배는 안 하시고 술만 드시면 일본의 압제에 분통을 터트려 화를 못 가누곤 하셨다. 이웃에 어려운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벽시계를 떼어 전당 잡혀주고 쌀자루를 갖고오라 시켜 뒤주바닥을 긁어 퍼주었으며 어렵게 사온 장작을 날라다주고 냉돌에서 자기 일수였다. 일제의 불의에 대항할때는 虎巖(호암)으로 노호하였고 민족을 연명시키는 국학의 밭을 가꿀 때는 湖岩(호암)으로 자적하셨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3월 12일 32세의 선생은 조선 13도 대표자 명의로 된 「哀願書(애원서)」를 보신각 앞에서 낭독 시위를 주도하다가 왜경에게 붙들려가 그해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8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셨다. 이미 그 이전인 1912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 국무총리 신규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홍명희 등과 同濟社(동제사)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하였고 1927년에는 국내 독립운동의 통합전선인 新幹會(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어 중앙위원과 간사를 역임하셨다. 이 광복운동과 언론 및 문필보국의 보훈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서재필 선생과 더불어 선생을 녹훈하였고 1995년 광복절에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헌법 규정에 따른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으셨다. 18세에 상투를 자르고 일본으로 건너가 정칙학교 명치학원 조도전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안재홍 정인보 이광수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과 뜻을 나누었고 압제 속에서 민족을 존명시키는 것은 국학을 살려 후세들을 기르는 일로 작심을 하고 고국에 돌아와 물려받은 천석 전답을 팔아 백낙준씨의 장인과 더불어 고향 의주에다 양실학교를 세워 손수 역사를 가르치셨다. 이어 평양의 대성학교 개성의 송도고보 서울의 경신학교 중앙고보 배재고보 중동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무렵 선생에게 배운 사학자 홍이섭은 세상을 보는 눈 앞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심지 역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욕을 심어주신 분이 바로 호암 선생이었다고 회고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학생층에 끼친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한편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30년대의 잡지 「개벽」 「학생계」 「청년」 「동명」 「별건곤」 「신생」 「삼천리」 「조광」 「신동아」 등의 잡지에 논설 역사 풍속 자연 등 선생의 국학 탐구의 글이 실리지 않은 달이 거의 없었다시피 하여 말살당해가는 민족의 자질 보존에 발악을 했다 할이만큼 기력을 쏟으셨다. 그간에 쓴 글은 총 150편으로 그중 「호암전집」 4권으로 출판되어 후학의 길잡이가 돼왔다. 벽초 홍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