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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오래 살기를 어찌 바라지 않을까마는 오래 살아도 이 민족이 겨레의 욕된 이름이 적지 않았거늘 불과 서른셋을 살고도 이 나라 이 역사 위에 찬연한 발자취를 남긴 이가 있으니 그가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나라의 주권이 도적의 발굽 아래 짓밟혀 강산이 통곡과 한탄으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선생은 나라의 장래는 오직 이 나라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라 깨닫고 종래 「애」 「애놈」 등으로 불리면서 종속윤리의 틀에 갇힌 호칭을 「어린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여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존댓말을 쓰기를 부르짖었으니 이 어찌 예사로운 외침이었다 하겠는가. 선생은 솔선하여 어린이를 위한 모임을 만들고 밤을 지새워 「사랑의 선물」이란 읽을거리를 선물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할 것을 선창, 이를 실천했으며 드디어 그 이듬해에는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어린이의 날」을 확대 정착시키며 어린이를 위한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니 이는 반만년 역사에 일찌기 없던 일이요 문건의 미몽 속에 헤매던 겨레에 바치는 불꽃같은 그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나라 잃은 이 나라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얼이 담긴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주어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일에 주야를 가리지 않았으니 그를 탄압하려는 일제의 채찍은 선생으로 하여금 경찰서와 형무소를 사랑방 드나들듯 하게 하였다. 오직 기울어가는 나라의 장래를 내일의 주인공인 어린이에게 바램을 걸고 오늘보다 내일에 사는 어린이를 위한 아동문화의 개화와 아동문학의 씨 뿌리기에 신명을 바쳐 이바지했으니 실로 청사에 길이 빛날 공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애달프다. 그처럼 눈부신 활약이 끝내는 건강을 크게 해쳐 마침내 젊은 나이로 홀연히 이승을 하직하면서 다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 는 한마디를 남기셨으니 뉘라서 이 정성 이 애틋한 소망을 저버릴 수 있으리오. 여기 조촐한 돌을 세워 민족의 스승이요 어린이의 어버이신 그의 뜻을 이 겨레의 내일을 위해 천고의 역사 위에 새겨두고자 하는 것이다. 1983년 어린이날 사계 이재철 짓고 월정 정주상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