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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만 이명:尹喆, 尹哲, 尹廣濟, 朴泰成, 尹昌善, 朱仁國, 吳基滿 황해도 연백(延白) 사람이다.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제2학년을 수료한 후 면학을 목적으로 수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민족운동가들과 교유하였으며, 1928년 4월 16일 신간회(新幹會) 배천지회(白川支會) 설립대회 당시 준비위원으로 홍세혁(洪世赫) 등과 함께 격문을 배부하려다 연백경찰서(延白警察署)에 피체되어 해주지방법원(海州地方法院)에서 소위 출판법위반 및 보안법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1929년 1월 홍남표(洪南杓)의 권유로 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에 가입하였고, 동년 겨울 홍남표, 김형선(金炯善), 구연흠(具然欽) 등과 함께 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해체하고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留 韓人獨立運動者同盟)을 결성하여 민족운동 기념일마다 재류한인들에게 격문을 반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구연흠, 조봉암(曺奉岩) 등과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청년반제상해한인청년동맹(靑年反帝上海韓人靑年同盟)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들은 중국공산당민족위원회 산하 청년반제대동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1년 6월 상해에서 김단야(金丹冶)로부터 국내의 김형선과 협력하여 적색노동조합(赤色勞動組合)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동년 7월 경성(京城)에서 김형선을 만나 협의한 결과 함남 진남포(鎭南浦)에서 활동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1932년 1월 진남포로 간 그는 한국형(韓國亨), 심인택(沈仁澤) 등과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기도하여 동년 10월 적색노동조합부두위원회(赤色勞動組合埠頭委員會)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진남포상공학교(鎭南浦商工學校) 적색비밀결사(赤色秘密結社)를 조직하였고, 평양에서는 면옥노동자총파업을 선동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9월 상해로 도항하여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에 상황을 보고하였다. 1934년 4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경에 의해 피체되어 국내 경기도경찰부로 압송되었다. 동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중병으로 인해 1936년 6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으나 옥고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