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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길림 봉천 북평 상해 아령등지의 우리 광복운동에 선생의 발길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미독립운동을 서북 간도에서 참획하시고 이듬해 경신에는 상해에 이르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사국장에 임하여 대중교섭의 요충에 당하였으며 이어서 광동 비상정부에 우리 임정의 대표로 2년간 상임하였고 4255년 임술에는 예관 신규식공이 순국한뒤를 이어 교포의 교육과 보호 대종교의 압박해제와 그 선양에 지력하였다. 4262년 을사이후는 상해에 장주하니 임정의 대중교섭 사무에 선생의 덕망과 수완의 보람이 컸것은 임정동지 제공이 누누히 증거하는 바요 선생의 중국명 복순 호 정일은 널리 중국 조야의 신망을 얻은바 되었다. 백범 김구주석을 보좌하여 낙양군관학교 한생반의 창성을 성취한것도 선생의 공이었다. 4272년 을유봄에 중경에서 임정의 법무부장이 되고 이듬해 경진에는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6년간을 그 임에 당하였으며 을유해방으로 임정이 환국한뒤에도 선생은 주화대표단장으로 중국에 체류하여 3년간을 남북화 각지를 분주하며 교포의 구호와 귀환 간시사무를 주관하였다. 업무과로의 나머지 불기의 중환을 얻어 4281년 무자 4월에 귀국요양하였으나 약석의 효없이 장서하시니 향연이 66이요 서울시외 망우리 묘지에 묻힌바 되었다. 부인 심씨는 부군을 따라 남북만주와 상해 중경을 전전하며 위로 구고를 받들고 아래로 자녀를 거느려 국사에 몸을 바친 부군을 대신하여 아들과 아버지의 구실까지 겸해서 갖은 고초를 겪으니 선생의 공적뒤에 부인의 덕이 큰것을 세상일 얼커르는바 되었다. 3남 2녀를 끼치시니 아들은 원준 시준 영준이요 딸은 덕원 복원이며 손자 천경 천권 천광 천일 천?가 있다. 금년은 선생이 돌아가신지 열일곱해 되는 해이다. 선생의 자 영준의 뜻을 듣고 선생 일대의 자취를 간추리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