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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 홍의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되자, 도변(渡邊)은 하는 수 없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곳에서 완 전히 철수하고 말았다.8) 그러나, 안규홍 의병부대는 얼마 뒤 거의 이후 최대의 시련을 맞이하였다. 1908년 5월 19일 서봉산(棲鳳山)전투에서 일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운 월치전투에서 승리한 뒤 안규홍은 서봉산으로 의병부대를 이진한 뒤 그 동안의 연전으로 인 한 피로를 풀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의병의 소재처를 탐지한 일군들은 의병들 을 포위하고서 19일 새벽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므로 의병측에서는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전열이 흩어져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의병측은 참모장 나창운 이하 25명 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하였던 것이다. 서봉산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안규홍은 일단의 부하의병들을 데리고 두 달 남짓 남해의 섬 으로 가 전력을 회복할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뒤 1908년 8월경 그는 석호산(石虎山 ) 에서 흩어진 의병들을 모아 재기하였다. 이 때에는 토착농민들과 심남일, 안재찬(安載璨) 등 인근에서 활약하던 의병장들이 후원을 해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심남일은 석호 산까지 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두 의병장간에는 돈독한 유대관계가 유지되었 던 것이다.9) 재기에 성공한 안규홍은 부하들을 이끌고 그해 8월 초순에는 광양으로 진군, 이 지역 어 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던 일인어선을 습격하여 일인어부들을 살해하였고, 이어 일군 측량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곳곳에서 일제의 조아(爪牙)로서 주민들을 괴롭히 던 일진회원들을 처단하는 활동도 벌였다. 또한 9월 13일에는 순천주둔 일군들을 가령치(加 嶺峙)[병치(幷峙)]로 유인, 격전을 벌여 큰 타격을 주었으나, 의병측도 선봉장 이영삼(李永 三), 이관회(李寬會), 유격장 안택환(安宅煥) 등이 전사하고 후군장 임정현(任淨鉉 : 거의 초 의 서기)이 일군에 포로가 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뒤 1908년 12월 말경 안규홍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고 혹한을 피하기 위해 이듬해 봄을 기약하고 잠시 부대를 해산한 뒤 겨울 동안 은둔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확고한 지휘체계와 군기가 엄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리라 추측된다.10) 이듬해 3월 이들은 약속대로 다시 모여 의병항전을 재개하였다. 그 동안 안규홍은 의병을 해산하고 상경하라는 황제의 밀칙(密勅)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의병항전을 방해하려는 일제의 간계임을 간파하고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는 이 무렵 호남행군소대장(湖南行軍 所大將)이라는 이름하에 의병을 통솔하였다. 안규홍 의병은 3월 8일 전해산, 심남일 등이 이끄는 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남평(南平) 거 성동(巨聲洞)에서 일군헌병대와 교전을 벌인 끝에 70여명의 일군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 다. 이를 필두로 이후 그해 4월까지 보성, 강진, 화순 등지를 진군하며 도처에서 일군 및 부일매국노, 일인어부들을 사살하여 그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한편, 안규홍 의병부대의 활약이 크게 두드러지자, 일군은 이를 '토벌'할 목적으로 그해 4 월에 광주와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2개 대대 병력을 차출, 출동시켰다. 그러나, 안규홍 의 병은 유격전술로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벌여 이들의 예봉을 끝까지 피할 수 있었다. 하지 만, 9월에 들어와 일제는 보다 적극적인 '의병토벌책'을 구상하게 되었다. '남한대토벌작전 ' (南韓大討伐作戰)이라 불리우는 전남지역의 의병근절책이 그것이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두 달 동안 펼쳐진, 전남지역의 의병을 초토화시키기 위한 이 작전에는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를 비롯해 군함 수척, 해군 11정대 등이 동 원되었다. 일시에 대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구축한 뒤 점차 이를 좁히면서 그 지역 안에 든 의병을 완전히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연대장 부석(富石)이 이끄는 보병 제2연대는 안규홍 의병부대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석은 안규홍 의병의 신원을 파악하고 그 부모처자에게 귀 순을 종용케 하는 공작을 벌이면서 작전준비를 완료하였다. 이와 같은 일군의 대대적인 작전을 눈앞에 두고, 안규홍은 그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8 월 29일 밤에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그는,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하고 민생을 위하려던 것인데, 하늘의 운세가 불리해 일군의 형세가 이처럼 강성해졌으니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막아내지 못하는 것은 이치로도 그 러한 것이다. 밖으로는 털끝만큼도 후원하는 이가 없고 안으로는 호구(虎口)에 든 형세에 놓이게 되어 백성들에게 해만 끼치게 되었으니, 나의 죄가 참으로 크도다. 그대들은 다시 뒷날을 도모하라.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