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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 치 [대치(大峙)]전투, 함평 월야(月也)전투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며 호남 서남부 일대에 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의병부대가 되었다. 그는 일군과의 전투 외에도 각지에서 일진 회 회원을 비롯한 순사, 헌병보조원 등의 부일매국노들을 회유 혹은 단죄하여 민생의 안정 을 도모하는 활동도 벌였다.12) 대동창의단의 활동이 이와 같이 활발해질 무렵인 1908년 겨울에 전해산은 심남일, 김영 엽(金永曄), 오성술(吳聖述) 등의 의병장과 함께 수차에 걸쳐 호남의병 연합체 결성을 상의 한 끝에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 의병장들의 추대 로 그 대장에 올랐던 것이다. 이 호남동의단의 진용은 아래와 같다. 대동의병대장(大東義兵大將) : 전해산 제1진의병장 : 심남일 제2진의병장 : 박도경(朴道京) 제3진의병장 : 김영엽 제4진의병장 : 조대천(曺大川) 제5진의병장 : 신화산(愼華山) 제6진의병장 : 이순식(李淳植) 제7진의병장 : 이기손(李起巽) 제8진의병장 : 오성술 제9진의병장 : 권 택(權 澤) 제10진의병장 : 안덕봉(安德峰)13) 그러나, 이처럼 호남의병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일제는 더욱 의병 '토벌'에 진력하게 되었다. 1909년에 들어와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졌다. 그들은 1909년 초부터 전해산이 활동 하던 지역에다 헌병, 경찰, 수비대 병력을 집중 배치, 그 활동을 제압하려 하였던 것이다 . 이에 따라 전해산의병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09년 4월에 영광 오동(梧洞)과 덕흥(德興)전투에서 일군 수비대와 헌병대에 연패를 당한 뒤에는 의병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어 거의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5월에 들 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의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전해산은 최후의 방편으로 부대 이동을 결심하였다.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북상할 생각 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부대이동 결심은 일제의 '토벌전' 강화, 농번기의 도래로 인한 모 병의 어려움, 오동 및 덕흥에서의 연패 등 복합적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다. 전해산이 새로 운 항전의 근거지로 선택한 곳은 이즈음 독립운동자들이 집중하고 있던 만주였다. 이에 그 는 "들으니, 만주에도 한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고 하니 원컨대, 우리도 그곳으로 가 새로 운 항전을 도모하도록 하자"고 부하들에게 만주행을 권하였으나, 이들은 그러한 제안을 거 부하였다. 거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난관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자, 전해산은 사세가 다했음을 판단하고 드디어 의병해산을 결심하 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1909년 5월 영광 오동촌(梧桐村)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 장(護軍將) 박영근(朴永根)에게 넘겨주고 장수(長水)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의진을 해산하 는 서글픈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서 달랬다. 호남 삼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위국서생(爲國書生)이 갑옷을 벗는다 산새도 시사(時事)가는 줄 아는지 밤새워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14) 그뒤 장수 반암(磻岩)에 은둔해 있던 전해산은 그해 10월 일제에 피체되어 1910년 8월 20일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심남일, 강무경(姜武景), 오성술, 박영근, 윤동수 등의 동지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2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