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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전해산(全海山) 전해산은 본명이 전기홍(全基泓)이나, 흔히 '해산 전수용'(海山 全垂鏞)으로 더 잘 알려진 호 남의병장이다. 의병항전 이후 아마 그가 본명을 피하고자 자호로서 이름을 대신하였던 결과 가 아닌가 한다. '수용'(垂鏞)은 원래 그의 자이고, '해산'은 의병항전 시절에 만든 자호인 것이다. 그는 이석용(李錫庸)과 함께 전북 임실이 배출한, 국망을 눈 앞에 두고 의병의 항일 전이 더욱 가속, 격렬해지던 1907, 8년 무렵에 구국항일전을 수행한 걸출한 의병장이다. 전해산은 본관이 천안으로 1879년 11월 24일 임실군 남면 국평리(菊平里)에서 시골 잔반 전병국(全炳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출사하지 못해 당대에 와서 는 겨우 그 고을의 향반으로 남아 빈한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해산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경(家耕)에 종사하는 한편, 틈틈이 학문 을 연마해 사장류(詞章類)의 학문에 특히 장재(長才)를 보였다고 한다. 그가 학문을 연마하 였던 곳은 당천(堂川) 이한룡(李漢龍)의 문하에서였다. 이한룡은 영남의 거유 면우( 宇) 곽 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그 부근 고을에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그가 인근의 양반 자제들 을 모아 교육을 시키자, 전해산도 그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고 이들과 교유하였던 것이 다. 유학의 경전 가운데서도 전기홍이 특히 심취했던 책은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었다. 또한 그가 역학에 밝아 신통한 예견력을 지녔다는 기록으로 보아 장성해 가면서는 주역에도 심취하지 않았나 한다.1) 전해산은 또한 장성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 호남 각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호남의 명유지사들인 기우만(奇宇萬), 기삼연(奇參衍), 김영엽(金永曄), 오성 술(吳聖述), 고광순(高光洵), 오준선(吳駿善) 등과 교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날로 기울어 가던 국운을 바로잡기 위한 구국의 방책도 생각할 수가 있었다. 특히 1903년 그의 나이 2 5 살로 한창 열혈의 기질이 발하던 청년시절에, 절의(節義)로 이름높던 선비들인 연재(淵齋 ) 송병선(宋秉璿)과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양인이 전북 임피(臨陂)의 낙영당(樂英堂)에서 회동, 강회를 베풀 때, 그는 동향의 이석용과 함께 여기에 참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강 회에서 받은 느낌을 그는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표현하고 있다. 낙영(樂英)이라 이름하니 의리는 가볍지 않고 산을 우르러 쫓았으니 원근(遠近)의 정을 알겠더라 사해(四海)에 풍진(風塵)이 일어 정결한 곳이 없으니 무슨 말로 제생(諸生)에 답할 수 있으리오2) 그뒤 1906년 최익현이 거의를 위해 태인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전해산은 지우(知 友) 이석용과 함께 그곳으로 내려갔다. 이때는 최익현이 거의의 준비단계로서 각지에 격문 을 돌리며 의사들을 규합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익현 의병부대가 전력과 전술면 에서 빈약함을 알고는 항전에 참가하지 않은 채 얼마 뒤 귀향하고 말았다.3) 하지만, 위정 척사의 거두로 그때까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일반 백성으로부터 추앙받던 최익현의 거 의는 전해산을 의병항일전에 투신케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전해산이 의병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종 사(從事)로 발탁되면서부터이다. 이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奇參衍), 김용구(金容球) 등이 주동이 되어 1907년 9월 전남 장성(長城)의 수연산(隨緣山)에서 조직된 호남의병의 연합체 이다.4) 그러나, 그는 이 회맹소에서는 실질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고, 단지 종사(從事)라는 직책만 수행하였다. 이러한 호남창의회맹소도 1908년 2월 공음(孔陰)전투에서 김용구 의병 부대가 패전한 이후에는 사실상 그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이 즈음 전해산은 임실 등지에서 활약하던 이석용의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5)에 합류함 으로써 보다 본격적인 의병항전의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즉 그는 1907년 겨울에 일찍부 터 친분이 두터웠던 창의동맹단의 단장 이석용과 상의한 뒤 그 부대의 참모로 들어가 의병 항전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 장수, 무주, 남원 , 순창, 구례, 곡성 등 호남의 동부지역 9개 군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도처에서 경찰서, 헌 병파견소, 수비대 등의 건물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군 '토벌대'와도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이는 등 호남 동부지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창의동맹단도 1908년 3월 남원 사천(沙川)전투에 서,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웅(大熊)[대운치(大雲峙)]전투에서 연패를 당해 그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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