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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 규섭(權奎燮) 등이 각기 일단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해 왔던 것이다. 이에 산남의진은 아 래와 같이 부서를 재편하였다.12) 대 장 : 정용기 참 모 장 : 손영각 도 총 장 : 박태종 후 봉 장 : 이세기 우 영 장 : 이규필 도 포 장 : 백남신 우 익 장 : 김성일 우 포 장 : 김일언 척 후 장 : 정성욱 장영서장(將營書掌) : 김진영(金震榮) 군문집사 : 이두규(李斗圭) 중 군 장 : 이한구 소 모 장 : 정순기 선 봉 장 : 홍구섭 좌 영 장 : 권규섭 연 습 장 : 조선유 좌 익 장 : 정래의 좌 포 장 : 장대익 유 격 장 : 임중호 점군검찰(點軍檢察) : 안수원(安守元) 산남의진은 재기 이후 1907년 9월 대장 정용기가 전사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 다. 초기의 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영천, 경주, 청하, 청송 등지에 분대를 두어 이 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 결과 기동성과 연합작전 수행 등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다 효과적인 항전을 수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907년 4월에 정용기는 5월까지 강릉에 집결시키기로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북상하던 중 청송지역에서 일군과 조우하는 가운데 시일은 점차 천연되어 원래의 약속을 이행할 수가 없 게 되었다. 이에 그는 정환직에게 글을 보내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13) 지금 군사가 천명이라 불리워지나 실상은 8백에 불과하고, 무기와 탄약이 부족해 일장 전 투 뒤에는 다시 산곡으로 후퇴하여 탄약 준비를 해야 하니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다. (중 략) 또 한 이유는 제(정용기)가 경상, 강원 연락지대의 내륙을 담임하기로 하고 신돌석은 연 해 요지에 있는 수로를 담임하기로 약조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신돌석이 수차 연해에서 낭패 를 당하게 되니, 저도 또한 군기준비를 못하여서 여기저기로 방황하는 동안에 서울과 영남 에서 언약한 일이 모두 어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8월이 되어 한국군이 강제 해산됨에 미쳐, 우재룡(禹在龍)을 비롯해 일부 해산 군인들이 산남의진에 가담해와 전력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정용기는 각지의 분대에 북상령(北上令)을 내려 부대별로 관동 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리하여 장영도소(將營都所 : 지휘본부)를 영일군 죽장면 매현리(梅峴里)로 정하고 정예병 백여명을 이곳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이때 의진의 주둔지를 탐색해낸 일군이 입암리(立巖里) 후원(後原)의 험준한 암석 을 거점으로 야음을 틈타 맹공을 가해 왔다. 의진에서는 마침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하던 이 세기, 우재룡, 김일언 등이 거느리던 일단의 의병들이 장영도소의 의병들과 함께 일군에 용 감히 대항하였으나, 끝내 의진은 괴멸되고 대장 정용기 이하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의 핵심 인물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산남의진의 재기항전도 이로써 종료되었으며, 얼마 뒤 정 환직에 의해 산남의진은 다시 재편되어 항일전을 계속해 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