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age

- 9 -   1900년 7월 유인석은 의화단(義和團)의 난을 계기로 귀국했다. 중국 북부지역 일대가 열 강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되자 그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황해도, 평안도 지역에서 학문 강학(講學)에 주력,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이 지역 주민 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기여하였다. 즉 그는 산두재(山斗齋, 평산), 숭화재(崇華齋, 개천), 흥 도서사(興道書社, 은율), 옥산재(玉山齋, 용천)을 중심으로 철산, 안주, 선천, 평양, 용강, 서 흥, 해주 등지를 부단히 왕래하면서 제자들을 기르고 또 향음례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 존 화양이(尊華攘夷)에 입각한 항일투쟁의식을 고취시켰던 것이다.26)    그후 유인석은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그를 이은 정미7조약을 계기로 연해주로 마지막 망 명길에 오르게 된다. 1908년 7월 67세의 노구로 그는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 으로 간 것이다. 2차에 걸친 서간도 망명 이후 세 번째 국외망명이었으며,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배 안에서 그는 자신의 비장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병든 한 몸 작기도 한데 휘달리는 범선 만리도 가볍구나 국명(國命)은 지금 어떤 지경인가 천심(天心)이 이 길을 재촉하도다 풍운은 수시로 변하고 일월만이 홀로 밝도다 주위의 한가로운 소리에 나의 심정 아득해진다 27)    연해주로 간 유인석은 이상설(李相卨), 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연해주를 중심으로 국외에 서 활동하던 분산된 항일세력을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코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10년 6 월 10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편성되었으며, 유인석은 이상설, 이범윤, 이남기(李南 基) 등의 추대로 그 도총재(都總載)가 되어 '복국존사부도보민(復國存社扶道保民)'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28) 그에게 있어 '십삼도의군도총재'란 직위는 1896년 거의 이후 이때까지 그 가 집요하게 전개해온 항일투쟁의 결과로 주어진 것으로, 이것이 그의 항일투쟁의 대단원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군'이 미처 항일무력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조국은 일제에게 병탄되고 말았다.   1910년 8월 23일 하오 '한일합병'의 비보가 전해지자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 주 지방의 한인들은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학교(韓民學校)에 모여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성명 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회명은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 〔성피지죄 (聲彼之罪) 명아지원(明我之 )〕는 뜻이다. 그 총대(總代)에는 유인석이 추대되었고 당일로 성명회 취지문(趣旨文)을 발표하여 조국 광복의 그날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 그리하여 유인석은 즉시 '합병'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 러시아 원근에 산재해 있던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가 망라된 8,624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의 서명을 받았다. 유인석이 서 두에 오른 이 서명록은, 열강에게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천명하고 그 지지와 후원을 요청하 는 '성명회 선언서'의 부본으로 첨부되어 각국 정부 및 신문사에 발송되었다. 성명회 선언서 는 중국 정부에 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구미 각국으로 보 내졌다. 이색적인 것은 이 선언서의 말미에 'Le President du Comite National de Core e (대한일반인민총대)'라 하고 유인석이 스스로 'Lu in sok'이라고 영문으로 서명한 점이다. 위 정척사사상에 철두철미했던 그가 조국독립의 대의를 위해 서양글자를 익혔던 것이다.29)    이 무렵 일제는 연해주 일대가 점차 항일투쟁의 본거지로 변해 가자 러시아에 대해 이 문제를 강력히 항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자의 체포, 송치를 강요하였다. 이에 일제 의 기세에 눌린 러시아 당국이 하는 수없이 이상설, 이범윤, 김좌두(金佐斗), 이규풍(李奎豊 ) 등의 항일운동가들을 일시 체포, 투옥하게 되었다. 이처럼 연해주의 형세가 급변하자 유인 석은 다시 최후의 망명지가 된 서간도로 이거할 결심을 했다.    1913년 2월 그는 서간도로 가는 도중 목화촌(木花村)에 잠시 유거(留居)하면서 중화론적 화이관에 입각해 동서양의 문물, 제도 등을 문답체의 형식으로 논술한 유명한 <우주문답(宇 宙問答)>을 저술, 간행하였다.30) 유인석은 1914년 3월 드디어 봉천성(奉天省) 서풍현(西豊 縣)에 도착하였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서간도 망명이다. 같은 해 5월에는 마지막 여행을 떠나 흥경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를 거쳐 최후의 귀착지가 된 관전현(寬甸懸) 방취구(芳 翠溝)에 도착, 그해를 넘긴 그는 1915년 1월 29일 74세를 일기로 손에 의자기(義字旗)를 들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