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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 도 총 장 : 이종곤(李鍾崑) 후 봉 장 : 서종락(徐鍾洛) 우 영 장 : 김태언(金泰彦) 도 포 장 : 백남신(白南信) 우 익 장 : 정래의(鄭來儀) 우 포 장 : 정완성(鄭完成) 군문집사 : 이두규(李斗圭) 중 군 장 : 이한구 소 모 장 : 정순기 선 봉 장 : 홍구섭(洪龜燮) 좌 영 장 : 이경구(李景久) 연 습 장 : 이규필(李圭弼) 좌 익 장 : 정치우(鄭致宇) 좌 포 장 : 이세기(李世紀) 장영집사 : 최기보(崔基輔) [지방연락책임자] 이규필(李圭弼) 백남신(白南信) 정완성(鄭完成) 최기보(崔基輔) 최치환(崔致煥) 정진학(鄭鎭 鶴) 정대하(鄭大厦) 이창송(李蒼松)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영해에서 거의한 신돌석 의진과 연락을 취하면서 청하읍을 공격목표로 삼고 4월 28일 행군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이 경주 관내의 우각(牛角 ; 금(今), 영일군 신광면 우각동)에 당도하였을 때 경주진위대장 참령 신석호(申錫鎬)가 정용 기에서 간계를 담은 서신 한 통을 보내왔다. 서울에서 정환직으로 추측되는 대관이 구금당 하였으니, 이 문제로 자기와 만나 상의하자는 것이었다. 정용기로서는 대단히 중용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의의 구상이 아버지 정환직으로부터 나온 이상 그 일이 중간에 누설될 경우 의진의 활동에 큰 제약이 가해질 것은 물론이며 더욱이 그의 아버지의 신변도 극히 염 려되었던 것이다. 이에 정용기는 진위대 병사들을 따라 경주성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것을 그를 체포하려던 진위대측의 함정이었다. 그는 입성 즉시로 피체되었으며, 얼마 뒤 대구 경 무청으로 압송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산남의진은 제대로 항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대장 정용기가 피체되고 말아 그 활동 이 중단되었다. 그뒤, 부(父) 정환직의 끈질긴 주선으로 특사를 받아 그해 9월 정용기는 대 구 경무청에서 풀려날 수가 있었다. 이에 정환직, 정용기 부자는 산남의진을 재건하기로 결 의한 뒤 앞의로의 활동계획까지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즉, 정환직이 서울에서 의병활동을 준비, 원조하는 동안, 정용기는 의진을 재편하여 영남 일대에서 군세를 크게 떨친 다음 1907년 5월까지 서울 진공을 위해 강릉에 집결토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용기는 향리인 영천으로 내려와 이한구, 손영각 등을 비롯해 사방에 흩어져 있던 옛 동지들을 규합, 산남의진을 재편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사방 으로 우국충정을 담은 격문을 띄우기도 하였다. 그 일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11) 지금 적신(賊臣)은 나라를 팔려 하고 이웃나라는 강성하여 외모(外侮)가 날로 심하여 대세 가 장차 기울려고 하니 5백년 지켜오던 문명국이 장차 공허로 돌아갈 것이며 2천만 생령의 멸망일이 목전에 당도하였다. 이에 그 누가 통곡하지 않으리오. 열성조(列聖朝) 함양의 덕을 추모해야 할 사류들은 (중략) 긴 밤에 벼개를 높이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만 구구한 낙을 취할 뿐이요 동량지화(棟梁之火)를 알지 못하고 있다. (중략) 비록 우리들은 용렬한 재 질이나 역량을 헤아릴 여가도 없이 장차 나라가 기울어지려 하는데에만 전심이 쏠리고 민족 을 구하려는 충곡(衷曲)만이 용솟음쳐 민병을 모아 널리 거의를 선포하는 바이니, 존비귀천 (尊卑貴賤)과 상하장유(上下長幼)를 가릴 것 없이 일치단합하여 의진의 대열에 동참토록 하 시라. 이와 동시에 정용기는 광무황제에게 창의의 배경과 그 정당성을 밝히는 상소를 올렸고 , 또 전국민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청조문'(請助文)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각지에서 의병이 쇄도해와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그 기세를 크게 떨칠 수가 있었다. 즉, 부산 , 대구 방면에서는 김현극(金賢極), 유화실(柳花實)이 화약을 운반하여 오고 안동에서 김석정 (金石井), 동해 방면에서 임중호(林中虎), 의성 지방에서 박태종(朴泰宗), 경주 지방에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