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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 12월 5일 : 영덕(盈德) 주방(周防)에서 일군과 교전. 12월 7일 : 영덕분견대 습격. 이와 같이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대구, 경주, 영천을 중심으로 영덕, 흥해, 청송 , 의흥, 신녕 등지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일군경의 전력 은 증강되어가는데 비해 의병측은 피로가 쌓이고 무기와 탄약이 점차 소모되는 등 전력이 현저히 저상되어 전투가 거듭됨에 따라 전황이 점차 의병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실정에 놓이게 되자, 정환직은 부득이 휘하 의병을 북대(北大), 동대(東大)에 집결 시킨 뒤 일정한 기일내에 각기 북상하여 관동에 집결토록 조처해 놓았다. 그리고 자신도 북 상하던 도중 청하 각전(角田 : 오늘날에는 죽장면(竹長面)에 소재해 있음)의 한 민가에서 병 을 치료하다 그의 소재를 탐지한 영천일군수비대의 급습을 받고 12월 11일 피체되고 말았 다. 그리하여 그는 청하로부터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 정환직은 일제의 온갖 협박과 유혹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그들을 질타하곤 하였다. 그뒤 그는 대구에서 다시 영천으 로 압송되어 향년 64세를 일기로 그곳 남교(南郊)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그는 죽음을 눈앞 에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자신의 비장한 심정을 드러내었다. 육신이야 죽더라도 마음만은 변치 않고 의(義)가 중하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도다 뒷일을 누구에게 의탁할까 말없이 않았으니 오경(五更)이 되었구나8) 정용기(鄭鏞基) 정용기는 자를 관여(寬汝), 호를 단오(丹吾)라 하고 1865년 역시 영천 자양 검단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넉넉치 못했던 까닭에 15세 때에 학문수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으나, 원 래 타고난 자질이 특출났으므로 서예, 회화, 음악, 율학 등 다방면에 능하였고, 그 가운데서 도 회화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정용기는 어릴 때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체격이 건장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우거하던 금 릉군(金陵郡) 봉계리(鳳溪里)에서 대흉년을 만나 아사자가 속출하고 어린 고아들이 길거리를 방황하는 것을 보고 몇 개의 방을 빌려 이들을 구제한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력이 강 한 양반층에 압박받아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에는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정의감이 남 달리 뛰어났다.9) 장성하게 되어서는 부(父) 정환직이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서울로 이거, 중 앙에서 벌어지는 일제침략의 실상을 목도하고 항일의지를 더욱 굳건히 다지게 되었다. 그러 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 늑결 뒤 부(父) 정환직이 의병봉기를 독려하는 광무황제의 밀지 를 받게 됨에 미쳐 그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향리인 영천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켰다 . 즉 정환직은 서울에 머물면서 아들 정용기의 거의를 원조하여 의진의 군세가 크게 진작되면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영천으로 내려온 정용기는 평소의 지우(知友)들인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 (孫永珏) 등과 함께 거사계획을 정하고, 먼저 일반 백성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할 목적으 로 국문으로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민간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여러 통유문(通諭文), 격려문 등을 돌려 의병을 소모하고 의병항전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 그리하여 정용기는 1906년 3월 각 고을의 포수 및 민병들로 이루어진 의병부대를 조직 , 산남의진이라 이름하고 각기 부서를 배치한 뒤 즉시 항전채비를 갖추었다. 이와 동시에 지 방연락 책임자를 선임하고 각지에다 활동책임자를 두어 각지의 민병을 소모하였을 뿐만 아 니라 보다 민활한 의병활동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 결과 산남의진은 의진 편성 초기에 벌써 1,0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출범 당시의 의진의 편제와 지방연락 책임 자를 들면 다음과 같다.10) 창의대장 : 정용기 참 모 장 : 손영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