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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 (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의 계획을 확정하고 1906년 3월 드디어 의진을 일으켜 산남의진(山 南義陣)이라 이름하고 즉각 항일전의 채비를 갖추었다. 이 즈음 영해지방에서는 신돌석이 활약하고 있어, 양 의진이 서로 호응해 가며 보다 강력한 항전을 펴고자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4월 28일에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신돌석과 연락을 취해가며 청하(淸河 ) 를 공격대상으로 삼고 행군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구체적인 군사행동을 취하기도 전 에 관군의 계략에 속은 대장 정용기가 사로잡혀 의진은 해체되고 말았다. 즉 산남의진이 영 천을 떠나 경주 우각(牛角 ; 금(今), 영일군 신광면(神光面) 우각동)에 이르렀을 때, 경주진 위대장 참령 신석호(申錫鎬)는 의진에 서신을 보내 "서울에서 정환직으로 짐작되는 인물이 체포되었다고 하니, 이 문제로 면담을 요한다."는 계략으로 정용기를 유인해 들이는데 성공 하였던 것이다. 정용기는 이것이 관군의 흉계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신석호를 만나기 위해 진위대 군사들을 따라 경주성 안으로 들어갔으나, 그는 관군측에 그대로 피체되어 대 구부로 압송되고 말았다. 아들 정용기가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환직은 백방으로 주선하여 9월에 들어 그를 석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정환직 부자는 산남의진을 재건하기로 하였다. 정환직은 정 용기에게 이듬해 5월까지 병력을 모아 태백산 줄기를 타고 강릉으로 북상, 전열을 정비한 다음 서울로 입성토록 지시하여 놓았다. 이는 산남의진을 서울에 입성시켜 일제통감부를 타 도하고 매국역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환직은 강릉에 본진을 정하고 북상 해 오는 의병들을 이곳으로 영접, 인도한다는 계획하에 무기, 탄약 및 군량 등의 준비에 진 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들 정용기가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동안 서울의 사저를 거점 으로 하여 내외 정세를 살피는 한편, 서울과 관동, 서북 등지의 동지를 규합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영남으로 밀파하고 동지를 서울에 잠류시켜 무기를 모으게 하고 또 화약제조법 등 을 가르쳐 강릉과 영남으로 분송하고 또 후일의 의병상경에 대비하여 가도 요로마다 격문을 붙여 반일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 군자금을 조달하여 영남으로 밀송하는 등 매우 분주한 나 날을 보내었다. 이로 인해 가산이 소진되어 가족 모두는 부득이 하향할 수밖에 없었다.6) 한편, 정용기는 고향으로 내려가 이한구, 손영각 등 옛 동지들과 더불어 산남의진을 재편 한 뒤 2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을 거느리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로부터 산남의진은 영천 , 경주, 청하, 청송 등 각처에서 일군들을 격파하며 의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본래의 계획 에 따라 서울을 공격코자 강릉지역으로 북상하기 위해 장영도소(將營都所 ; 의군지휘본부 ) 를 영일의 죽장(竹長)으로 이동, 설치하여 휘하 의병의 북상준비상황을 점검하던 중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일군의 야간기습을 받아 장영도소의 의병이 입암(立巖)에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입암전투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해 이한구, 손영각 등 의진의 참모들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산남의진의 재기활동은 종식되고 만다. 아들 정용기가 입암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환직은 급거 귀향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들을 대신해 대장이 되어, 입암전투에서 살아남은 이세기(李世紀), 우재룡(禹在龍 ) 등과 함께 삼남의진을 다시 일으켰다. 자식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업을 계승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하겠으나, 정환직은 아들의 뒤를 이어 의병대장에 올라 항일전에 투신하였던 것이 다. 새로 의병대장에 오른 정환직은 청송 보현산(普賢山) 일대를 산남의진의 근거지로 삼아 장령과 종사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의병을 소모케 하는 동시에 적진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 다. 이어 영일의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의진의 근거지를 옮기고 무비와 군량을 갖추며 군 사훈련에 힘쓰는 한편, 의진의 부서를 새로이 편성, 항일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정환직은 9월 3일 약 9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청하분파소를 습격, 순검 박성호(朴成鎬)를 처단하면 서 활동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이후 정환직 의병의 활동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 10월 2일 : 약 150여 명이 출동하여 영천 자양(紫陽)으로 출장온 영천분파소의 헌병보조원 박원일(朴元一)을 처단. 10월 29일 : 흥해분파소(興海分派所) 습격, 군기를 노획하고 우편취급소의 일인 3명을 처단 한 뒤 건물을 소각. 11월 3일 : 약 50여 명이 신녕분파소(新寧分派所) 습격, 총기 60정을 노획한 뒤 건물을 소 각. 11월 4일 : 약 100여 명이 의흥(義興)분파소 습격, 일군경을 격퇴시킨 뒤 총기 49정 노획. 11월 8일 : 청송군 유전(楡田)에서 일군과 교전. 11월 16일 : 약 200여 명이 흥해분파소를 다시 습격, 군경 2명을 사살한 뒤 분파소와 경관 가옥을 소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