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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정환직,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山南 ; 영남을 말함)의진은 1905년 을사오조약 늑결 직후 영 천을 중심으로 한 경북 남동부 일대에서 그 위세를 크게 떨친 의병이다. 특히 이 의진을 주 도했던 정환직, 정용기는 부자간으로 양대가 의병대장에 올라 항일전을 수행한 끝에 모두 순국하고 만, 의병항전사상 유례가 드문 경우에 해당된다. 정환직(鄭煥直) 정환직은 1844년 5월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紫陽面) 검단리(檢丹里 ; 금(今), 충효동(忠 孝洞))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엄(東嚴)이며 연일(延日)이 본관이다. 임란 때 민병을 모집, 영천, 월성(月城) 일대에서 크게 용맹을 떨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 0 세손이라하며, 증조부 정하호(鄭夏濩)는 성균관생원이었다 한다. 이와 같은 집안 내력으로 미루어, 그는 다소 가세가 기울게 된 잔반의 후예로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정환직은 가세가 넉넉지 못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침술을 배워 의원 행세를 하면서 생계 를 영위하였다. 그러다가 1887년 44살의 늦은 나이로 벼슬길에 나아가 5품관인 서울의 북 부도사(北部都事)에 임명된 뒤 이듬해에는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올랐다. 그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자, 관인의 신분이던 정환직은 일반 적인 추세에 따라 동학군 진압에 앞장섰다. 즉, 1894년 초 삼남지방에 동학군이 극성하였을 때에는 임금의 명으로 삼남참오령(三南參俉領)이 되어 동학군 토벌에 앞장섰으며, 그해 겨 울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일대에 동학군이 집결하였을 때에는 인근의 금광에서 일하던 광 부들을 거느리고 동학군을 선무한 뒤 이듬해 봄에 귀경하는 등 동학군 선무공작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정환직은 이 즈음 그의 사상적 단면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격서들을 발표하고 있어 주목 된다. 우선 그는 청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한 뒤 한국침략의 하수인이 된 대조규개(大鳥圭 介)를 질타한 '격일장대조규개'(檄日將大鳥圭介)를 발표, 나라를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민 족 자주성에 대한 자신과, 한민족의 힘으로 일제침략세력을 격퇴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민 족정기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황해도 구월산 일대의 동학군을 물리치기 위해 정부에서 일 제군대의 힘을 빌리려는 계획이 수립됨에 미쳐서는 '일병의뢰반대소'(日兵依賴反對疏)를 올 려 그 부당성을 강력히 통박한 뒤 스스로 동학군의 선무, 평정 책임을 담임하였던 것이 다.1) 그뒤 아관파천(俄館播遷) 때에는 잠시 벼슬에서 물러난 적도 있었으나, 1897년 대한제국 이 성립되고 황제즉위식이 거행된 뒤에는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에 임명되어 황제 측 근의 근신이 되었다.2) 또한 1899년에는 다시 삼남검찰겸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에 임명 되어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지방치안을 확보한 다음 8월에 귀경, 시종관으로 봉직하게 된 다.3) 정환직은 1900년 여름에는 원수부위임겸삼남시찰사(元帥部委任兼三南視察使), 겨울에는 도찰사(都察使)로 승진되어 경주 방면으로 암행순찰을 돌며 각지에서 부패한 관리들을 탄 핵, 숙청하던 중 모함을 입어 한때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얼마 뒤 무죄가 판명되어 석 방되었지만, 그는 이제 관직생활에 대한 염증을 느껴 사직서를 올리고 퇴사하려 하였다. 그 러나, 광무황제는 다시 그에게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 벼슬을 내렸다.4) 정환직이 중추원의관으로 있던 1905년에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의 본격적 단계인 을사오 조약을 늑결, 국망이 목전에 다가왔다. 이에 그는 관직을 박차고 분연히 의병 대열에 투신 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처신에는 그에게 내려진, 의병봉기를 고무하는 황제의 밀조가 그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을사오조약이 늑결된 뒤 광무황제는 측근의 인물들에게 의병항전을 은근히 부추기는 밀조 를 내려 각지의 의병봉기를 독려하였던 것이다. 노응규(盧應奎) 등과 같이 정환직도 바로 이때 황제의 밀조를 받고 의병항전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5) 황제의 밀조를 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와 함께 거의 문제를 의논한 끝에 자신은 그대 로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병을 후원키로 하고 정용기가 향리인 영천으로 내려가 거의토 록 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이들은 궁극적으로 지방에서 군세를 크게 진작한 뒤 서울로 진공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설정해 놓았다. 고향으로 내려온 정용기는 평소의 지기지우들인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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