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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일 시 인솔병력 전투장소 전 과 비 고 1906.6. 1,000평해부근   대구, 원주진위대 300명 1907.8.20. 300영양읍 헌병분파소, 관아 소각   1907.9.13. 220 평해 상리면(上里面)각 동(各洞) 군자금 720냥 모 금     1907.9.15. 150영양동북 20리   등전(藤田)대위 인 솔 일군토벌대 1907.9. 300(이강년 : 600) 문경부근 영해읍   국지(菊池)대위 인 솔 일군토벌대 1907.10.12. 150      1907.10.25. 240평해 하리면(下里面)군자금 96원  1907.10.25~28240 평해 원서면(遠西面) 북하리면(北下里面) 하 리면(下里面) 군자금 2404원  1908.1.2. 1200~1300 양구범동리(犯洞里) 자 작현(自作峴)     1.13. 8평해읍 출현     2.3. 26 평해 남면(南面) 후포 리(厚浦里) 군자금 84원  2.6. 80평해 선미동(仙味洞) 군자금 60원, 군량 미 21석   2.13. 180평해 원서면 직천동(直군자금 100원  라 생각하고 영주, 예천, 함창, 상주, 안동 수비대로부터 차출된 6개 종대(縱隊 : 각대 15∼ 20명)의 '토벌대'를 편성하고 2월 15일부터 일월산 지역의 신돌석 의병에 대한 '토벌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부대로 산간오지로 흩어진 신돌석 의병은 유격전을 펼쳐 끝내 이들 을 물리친 뒤 영해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다.10) 당시 '토벌전'에 실패한 일제는 신돌석 의병 의 민활한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폭도(신돌석 의병)는 소군(小群)으로 분산하여 은닉하고 있으므로 토벌대는 용이하게 수색 단서를 얻지 못하고 행동지역 안의 각 촌락만을 면밀하게 수색하였다.11) 신돌석은 경찰대, 수비대, 헌병대에 의해 토벌당한 것이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 그는 실로 출몰이 자유자재하여 용이하게 체포할 수가 없다.12) 이처럼 일군의 '토벌작전'이 빈번히 실패로 돌아가자, 일제는 신돌석을 회유하기 위한 공 작을 펼치기도 하였다. 도장관(道長官)의 맹세(盟誓)니, 일제 통감의 편지니 하는 것들을 그 에게 보내 귀순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돌석은 이같은 귀순권유서를 불사르고 끝 까지 항일투쟁을 벌일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그의 부인을 감금하여 극진히 대접 한 뒤 귀순을 권유하는 서한을 써 그에게로 보내기도 하였지만, 이때에도 그는 부인을 크게 꾸짖고는 이러한 제안을 즉각 물리쳤다.13) 이후 신돌석은 영덕을 중심으로 흥안(興安), 울진, 삼척, 안동 등 경북 동해안 일대를 오 고가며 도처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뒤 1908년 11월(음력) 그는 겨울이 다가오자 그 동안의 연전으로 인한 전력의 손실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명년 봄을 기약하고 잠시 의진을 해산시켰다. 그리하여 신돌석은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각지를 전전하던 중 11월 중순경(음력) 영덕 눌 곡(訥谷)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부하였던 김상렬(金相烈)의 집을 찾았다. 황 금에 눈이 먼 김상렬은 그의 아우 김상근과 함께 신돌석을 반갑게 영접하는 체하며 술과 고 기를 권해 만취케 한 뒤 깊은 잠에 빠진 그를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그의 목에 걸린 상 금을 노렸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믿었던 부하의 손에 횡사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3 1 살이었다. 신돌석의 항일의병항전을 개관,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14) 신돌석(申乭石)의 의병항전 내력 (1906. 6∼190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