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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外三十里之地))의 정확한 위치는 관계자료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망우 리 부근으로 비정된다. 23) 신용하 : <허위의 의병활동>, p.66 및 《독립운동사 1》, pp.553∼554 참조. 24) 위와 같음. 25) 위와 같음. 26) 《황성신문(皇城新聞)》1908년 6월 19일자. 한편, 허위 피체 뒤 그의 심문을 맡았던 경 성헌병대사령관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은 그의 피체일자와 장소에 대해 이와는 달리, "5월 24일 아침 경기도 연천군 반석동(班石洞)이라는 심산벽지에서 철원헌병대 분대장 태전(太 田) 대위에게 피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라사랑》27, p.186). 27)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 p.243. 28) 같은 자료, p.245. 29)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8년 10월 24일자, <천일무광(天日無光)> . 30) 《주한일본공사관기록》1908년 12월 2일, <제5회 안응칠공술요지(安應七供述要旨)> . 신돌석(申乭石) 신돌석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거점으로 활약하던 의병장으로 오늘날까지 이곳 주민들에게 ' 태백산 호랑이' 혹은 '신장군'으로 불리워지며 그의 활약상이 전설적으로 구전되는 인물이 다. 하루에 천리길을 달리며, 수십장(丈)의 구릉을 한 발에 뛰어 넘었다는 이야기들은 모두 가 그의 탁월한 용력과 강렬한 의협심이 세인의 칭송속에 과장되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결과 라 하겠다. 이름 '돌석'(乭石)에서도 짐작되듯이, 그는 구한말의 의병사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평 민 출신의 의병장이다. 현재 그의 생애와 활약상을 밝혀주는 자료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 다는 안타까운 사실도 그의 이러한 신분적 배경에 기인하는 것 같다.1) 신돌석은 1878년 12월 18일 경북 영해군(寧海郡) 남면(南面) 복평리(福平里)에서 신석주 (申錫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순경(舜卿)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그의 본명 은 신태홍(申泰洪)이었고, '돌석'이라는 이름은 원래 그의 아호였으나, 의병항전에 투신하면 서부터 이 이름을 더욱 세상에 드날리게 되었다. 신돌석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 어와 그의 집안은 벼슬길이 막혔고, 7대조 때부터는 드디어 동해안의 오지인 영해로 내려와 이곳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대에 와서는 천민의 신분으로까지 전락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돌석은 어려서부터 용력과 기상이 출중했던 듯하다. 일찍이 마을의 서당에 다녔는데 , 초한(楚漢)이 자웅을 결하는 대목에서는 스스로 의분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성장하면서 인근 고을에서는 그의 용력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으며 장차의 재목으로 지 목하였다고 한다. 15세가 되자, 신돌석은 어린 나이로 자신의 뜻을 펴고자 사방으로 지사, 명인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그는 뒷날의 거의를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영해지방은 개항 이후 밖으로는 일제를 비롯한 외세침략이 가열되고 안으로는 전통 시대의 내부적 모순이 심화되어 가던 시절인 1871년에 동학운동과 민란이 혼재되어 일어난 '영해민란'으로 한때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던 곳이다. 그러므로 이 일대에는 그때까지도 외 압에 항거하는 잠재적 전통이 복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돌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그해 겨울부터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 하게 되었을 때 19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처럼 어린나이에 항일의병의 선봉에 선 예도 흔치가 않다고 하겠다. 그는 타고난 용력과 담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워, 영 해의병진의 중군장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김하락 의병진이 경주에서 패한 뒤 5 월 하순(음력)경 영덕 방면으로 이동해 오자, 의병을 이끌고 가 연합전을 펴기도 하였다.2) 그뒤 일시 의병항전을 중단한 뒤, 신돌석은 10년 동안 각지로 지사, 의사들을 찾아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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