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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 6) 그러므로 허위가 평리원의 책임자로 내정된 것을 당시 언론에서는 크게 환영하였는데 , 그 가운데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싣고 있다. "평리원서리재판장허위 씨(平理院署理裁判長許蔿氏)가 시무(始務)한 지 수일(數日)에 적체(積滯)한 송안(訟案)을 일 체판결(一切判決)하여 장차(將次) 건체지탄(愆滯之歎)이 무(無)하리라고 칭송(稱頌)하더라. " (《황성신문(皇城新聞)》1904년 8월 6일자) 7) 장지연(張志淵)의 행적과 사상은 이훈옥(李薰玉) :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의 변혁사 상연구(變革思想硏究)>(인하대학교(仁荷大學校) 박사논문(博士論文), 1989. 8), pp.53∼8 2 참조. 8)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 p.237. 9) 이때 전국에 발송된 배일통문 속에서 전국민이 의병항전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신용하(愼鏞廈) : <허위의 의병활동>, 《나라사랑》27, 외 솔회, 1977. 6, p.57).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중략)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숴 칼을 만들고 (중략) 우리들은 의군을 규합 하여 순리를 따르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10) 신용하 : <허위의 의병활동>, p.60 참조. 1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7년 9월 21일자 참조. 12) 신용하 : 앞의 논문, p.62. 13) 허위를 중심으로 하는 십삼도창의군의 조직과 활동에 대해서는 신용하(愼鏞廈) : <전국 (全國)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연합의병운동(聯合義兵運動)>(《한국독립 운동사연구》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pp.12∼41 참조. 14)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7년 9월 29일자. 신용하 : 앞의 논문, pp.12∼13에 서 재인용. 15) 박성수(朴成壽) : 앞의 글, pp.74∼75 및 《독립운동사 1》, p.505 참조. 16)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제41권 1책, p.819. "Compatriots, we must unite an d to consecrate ourselves to our land and restore our independence. We must appea l to the whole world about grievous wrongs and outrages of barbarous Japanese. The y are cunning and cruel and are enmies of progress and humanity. We must all do ou r best to kill all Japanese, their spies, allies and barbarous soldiers." 17) 신용하 : 앞의 논문, pp.13∼14. 18) 그러나,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전서 (朴殷植全書) 상(上)》, pp.466∼467)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9년 7월 30일 자)에서는 이와는 그 편제를 약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십삼도창의대진소총대장 이인영 군사장(軍師將) 허 위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이 편제는 신태수, 신돌석 등이 미쳐 합류하지 못해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개시 직전 에 다시 개편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신용하 : 앞의 논문, p.15) 19) 이와 같은 유생의 집상문제는 이보다 앞선 을미의병장 유인석의 경우에도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즉 그는 문인지사들과 함께 제천에서 최종적인 3가지 처신의 방책을 논의하고 난 뒤 모상(母喪)을 당한 신분이었던 까닭에 적극적인 거의방책에 가담치 못하고 거수(去守 ) 를 일시 결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당시 유생들에 있어서 집상문제는 절대적인 비중 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박민영(朴敏泳) :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위정척사운 동(衛正斥邪運動)>, 《청계사학(淸溪史學)》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86, p.20 5 참조) 20) 박성수 : 앞의 글, p.87 참조. 2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9년 9월 21일자. (윤문....필자) 22) 허위가 선발대를 거느리고 진격해 온 '동대문 밖 30리 지점'(동대문외삼십리지지(東大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