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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기색이 없이 일제침략을 당당히 성토해 의병장으로서의 절의를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게 된 동기에 대해,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한국을 멸할 흑심을 가졌다. 우리 들이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미력하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27) 라고 하여, 일제침략이 그 기인이 되었음을 명쾌히 설파하고 있다. 허위의 고매한 인격과 강직한 성품에 감복한 명석(明石)은 그를 심문하면서도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존경하였고 , 심지어는 그의 구명운동까지 벌였다고 한다. 그뒤 허위는 9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21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형의 집행을 앞두 고 왜승이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읽으려 하자 그는,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28) 라고 대성일갈하며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또 한 검사가 그에게 사후 시신을 거둘 이가 있 느냐고 묻자, 죽은 뒤의 검시(檢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이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 행하라.29) 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12년 동안 구국의 일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허위는 54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뒷날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총살한 대한의사 안중근(安重根)은 법정에서 허위에 대해 다음 과 같은 평을 남겨 후인에게 많은 감명을 주고 있다. 허위씨(許蔿氏)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勇猛)의 기상(氣象)이 동포 2천만민에게 있었더라면 오늘의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관(高官)은 자기 생각 만 있고 나라 있음을 모르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관 중에 충신이라 할 수 있다.30) 각 주 1) 성재 허전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후손으로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의 문하에서 수 학한 인물이다. 김해부사 등 외직에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향약을 강론하는 등 유학의 도 덕정치를 구현하는데 노력하였다. 한편, 계당 유주목은 서애(西涯) 유성용(柳成龍)의 후손으 로 고종 초년에 우의정에 오른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의 아들이다. 2) 박성수(朴成壽) : <허위의 사상과 투쟁>(《나라사랑》27, 외솔회, 1977. 6), p.76 참조 . 허위(許蔿) : 《국역허위전집(國譯許蔿全集)》(아세아문화사(亞細亞文化社), 1985), <연보(年 譜)>, p.285. 3) 허위의 첫째, 둘째 형인 방산(舫山) 허훈(許薰)과 성산(性山) 허환(許煥)이 진보지방에서 을미의병을 주도하게 된다(김도현(金道鉉) :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 운동사자료집 2》, 보훈처, 1971, p.27 참조). 그뒤 1910년 국치 직후 허환은 허위의 유자 (遺子)를 거느리고 간도로 망명, 허로(許魯)로 개명(改名)하고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4) 《독립운동사 1》, p.244 ; 이기린(李起燐) : 《지산유고(止山遺稿)》권3, <일기(日記)>. 5) 지례군에는 이른바 토비보방단(土匪保防團)이 조직되어 있어 동학농민운동 때는 동학군 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의병이 봉기하자, 지례군수는 이들을 모아 의병과 대적한 것이다.(박 성수(朴成壽) : 앞의 글, p.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