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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유인석 의병 주요 활동지역>   를 전전하며 간간히 관군 및 일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인 다음 유인석 의병진은 6월 10 일, 원주 강천(康川 ; 현 여주군 강천면)에서 드디어 서북행의 장도에 올랐다. 그후 영월, 평창, 정선, 강릉, 대화를 거치고 양구, 회양, 평강, 소금강, 안변, 영흥을 지나는 동안 소토 장(召討將) 서상렬이 전사하는 등 갖은 고초를 다 겪은 뒤 마침내 서북지방에 당도, 양덕, 맹산, 덕천 등지에 유진(留陣)하였다.22) 그러나, 이곳에서도 도처에서 관찰사, 군수가 의병 진에 핍박을 가해 왔기 때문에 군사를 더 이상 주둔시킬 수가 없어 당초의 계획대로 재기항 쟁을 도모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에 유인석은 청(淸)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또 이것 도 여의치 못하면 일제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수의(守義)하며 재기항쟁의 준비를 할 생각으로 서간도 망명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는 나머지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을 계속, 영변, 운산을 지나 8월 23일 압록강변의 초산(楚山)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서 다시 한번 친일개화 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23)을 발표한 뒤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懷仁縣)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그곳 현재(縣宰) 서본우(徐本愚)는 의병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입국하는 것은 불법 이라고 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이에 유인석은 눈물을 머금고 9월 28일 혼강(渾江; (波  江)변에서 그때까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이곳까지 따라온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 았다. 이로써 유인석의 을미의병항쟁은 종식되었고,24) 이후 그는 장기지속적인 형태의 항 일투쟁으로 그 방향을 전환시켜 가게 되었다.   의병해산 후 유인석은 이주한인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가 정 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897년) 3월에는 고종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곧 그곳으로 되돌아 갔다. 이를 전후해서는 그의 문인사우들도 적당한 수의처(守義處)를 물색, 대거 서간 도로 망명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이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의체(義諦)'를 약정, 항일투쟁- 보화(保華)-의 의지를 뚜렷이 밝혔다.   만고의 화하일맥(華夏一脈)이 추진(墜盡)된 나머지에 천신만고로 그 전형을 준보(準保)하 여 화하(華夏)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 진실로 우리 마음이기에, 비록 하루 화하를 더하더 라도 마는 것보다는 낫다. 이로써 심법(心法)을 고수하여 옛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 문하에서 전수한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  迫不得已)' 여덟 자의 의미에 절부(竊附)하 노라.25)   뿐만 아니라 유인석은 그곳에서 '효제(孝悌)'와 '충순(忠順)'을 덕목으로 하는 향약을 실시 해 이주한인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공자, 주자, 우암, 화서, 중암, 성재 등의 영정을 봉안 하는 성묘(聖廟)를 세워 이역에서의 정신적 귀의처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