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page

- 78 - 관동창의대장(강원도) 민긍호(閔肯鎬) 관서창의대장(평안도) 방인관 관북창의대장(함경도) 정봉준 이처럼 13도창의군이 편성되자, 이인영, 허위 등은 곧바로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게 되었 다. 허위는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하도록 조치한 뒤, 스스로 3백여 명의 선발 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해 왔다. 그러나, 이때 후발 본대의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의 부고를 받고 집상(執喪)을 위해 문 경으로 급거 귀향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전통 유생의 신분인 그로서는 부친 의 집상문제를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19) 이에 이인영으로부터 전권을 물려받 게 된 허위는 대리총대장겸 군사장의 직책으로 13도창의군의 총지휘를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13도창의군의 서울침공계획은 너무 잘 알려져 있었으니, 《대한매일신보》같은 언론에서도 이미 거사 두 달 반 전에 이를 크게 보도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일제 는 서울 외곽의 방비에 오래 전부터 전력을 기울여, 양주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 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의병 이 그 방어망을 돌파하기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던 형편이었다.20) 군사장(허위)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같이 함에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는 지라 이에 전군에 전령하여 일제(一齊) 진군을 재촉하여 동대문 밖으로 진격함에 대군은 장 사(長蛇)의 세로 서진(徐進)케 하고 씨가 3백명을 솔(率)하고 선두에 서서 문 밖 30리 지점 에 진군하여 전군의 내회(來會)를 기다려 일거에 경성을 공입(攻入)하기로 계획하였더니 전 군의 내집(來集)은 시기를 어기고 일병(日兵)이 졸박(卒迫)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 격하다가 후원(後援)이 부지(不至)하므로 그대로 퇴진하였더라.21)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같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22)까지 진격한 허위의 선 발대는 후발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군의 공격을 받아 접전을 벌인 끝에 화력과 병력 등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배하고 말았다. 또한 뒤늦게 도착한 본대는 서울침공전을 전개해 보지도 못한 채 작전이 중도에서 포기되고 말았다. 이로써 연합의병부 대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전과 같이 각 부대 단위로 흩어져 독자적 인 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서울진공작전이 중도에서 포기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동력 과 화력이 일군에 비해 현저히 열세에 놓여 있던 의병측의 전력에 비추어 볼 때, 각지의 의 병이 단합, 서울 외곽까지 진공해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를 지닐 수가 있는 것 이다. 서울에서 퇴각한 허위는 다시 임진강, 한탄강 유역을 중심무대로 의병항전을 재개하였다 . 그의 휘하에는 조인환(趙仁煥), 권준(權俊), 왕회종(王會鍾), 김진묵(金溱默), 박종한(朴宗漢) , 김수민(金秀敏), 김응두(金應斗), 이인영(李寅榮), 이은찬(李殷瓚) 등의 쟁쟁한 의병장들이 있 어, 각각 부대를 나누어 거느리고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여 일군을 격파시켰다. 의병들은 일 군의 진지를 기습하기도 하고, 각지의 부일매국분자들을 소탕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의 군량은 체계적으로 공급된 반면에 납세와 미곡의 반출은 허위의 명령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 그러므로 그가 활동하던 임진강, 한탄강 일대는 허위 의병부대의 군정 아래 있는 것과 다름 이 없었다.23) 허위는 의병의 군율을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비조달시에는 군표(軍票)를 발행 , 뒷날 보상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이 결과 각지의 주민들은 허위 의병부대에 적극적인 후원 을 해와 항일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허위 의병부대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장박(張博)을 통하여 그의 의병항전 을 종식시키려고 해산을 권고해 보았으나, 허위는 즉각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대동학회(大 東學會) 회장 신기선(申箕善)이 허위의 부하 이병채(李秉埰)를 통하여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 그는 이도 물리치고 최후까지 의병항전을 펼칠 것을 천명하였다.24) 1908년 4월 21일 허위는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朴正彬) 등의 의병장과 연명으 로 전국민이 의병항전에 진력해 줄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그는 머지 않 아 대규모 결전의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5월에는 부하 박노천(朴 魯天), 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에 잠입시켜 통감부에 광무황제의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 부 철거, 이권침탈 중지 등을 골자로 하는 30여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그러한 요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