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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그리고는 금산군(金山郡) 금릉(金陵)으로 들어가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을 한 뒤, 김산과 성주 두 곳에다 진을 쳐 놓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하여 각지에 격문을 발송, 의병을 소모(召 募)하였다. 그러나, 지례(知禮)군수는 이 의병을 격파하기 위하여 군내의 자위군5)을 소집하 는 한편, 의병봉기 사실을 대구관찰사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허위 의병은 지례의 보위군을 쉽게 격파하였으나, 곧이어 도착한 공주와 대구의 관군을 맞아서는 고전 끝에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아직 거의한 직후이므로 진세가 떨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적의 대공세를 당하게 되어 의병진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은찬, 조동호 등의 의병주모자들은 관군에 포로가 되었고, 허위는 잔여 의병들 가운데 서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 80명을 모아 상주 및 김산의 지사들과 함께 김산 서북방에 위 치한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그는 의병들을 거느리고 북상을 계속 , 충북 진천(鎭川)까지 진격해 들어 갔다. 그러나, 이 즈음 근신 전경운(田慶雲)으로부터 의병 진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밀지가 도착, 의병진은 해산되고 만다. 허위는 첫의병항전에 실패한 뒤 진보에 있던 맏형 허훈에게로 가 학문에 진력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그는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1899년 3월 중앙의 관계로 진출, 관직을 통 한 항일운동을 펴게 되었다. 이후 그는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소경원봉사(昭慶園奉事), 성 균관박사(成均館博士), 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평리 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거쳐, 1904년 8월에는 평리원서리재판장(平理院署理裁判長 ) 에 임명되었다. 이는 사법부의 최고 직책으로 정부 요직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평 리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 여 그 칭송이 자자하였다.6) 이 기간에 주목되는 점은 허위가 유명한 항일언론가이자 변혁 사상가인 위암(韋菴) 장지 연(張志淵)7)과 교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허위는 그때까지 전통 유학을 학문 기반으로 삼아 처신해 왔지만, 장지연과의 교유를 계기로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사상 전환의 단면은 그가 1904년 8월 10일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었을 때 정부 에 건의한 10가지 조목 가운데 학교 건립, 철도, 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을 주 장한 대목에서도 보이고 있다.8) 일제는 1904년 2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침략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 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 한국침략에 더욱 박 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의 군사요충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 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자, 허위는 이상천(李相天), 박 규병(朴圭秉) 등의 관료 동지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9) 일제 침략에 대해 정부 관료들 중에 그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허위가 주동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항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즈음 일제의 이러한 침략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송병준(宋秉畯), 윤시병(尹始炳) , 유학주(兪鶴柱) 등의 부일배들이 주동이 되어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를 조직하자, 허위는 강력한 반일진회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12월 이용태(李容泰), 신기선 등과 함께 정 우회(政友會)를 조직, 활동한 것이 그것이다. 이와 동시에 전국민의 항일봉기를 호소하는 격 문을 다시 전국에 발송하였다. 그러나, 허위는 그간의 항일행적이 빌미가 되어 1905년 1월 일제헌병대에 구금되고 만 다. 며칠 뒤 그는 의정부참찬을 사임하고 석방되었다. 그뒤 약 2개월간 집에서 시국을 개탄 하고 지내던 중, 3월 2일 다시 비서원승( 書院丞)에 임명되었으나, 일제는 그의 항일투쟁 을 두려워하여 최익현(崔益鉉), 김학진(金鶴鎭) 등과 같이 3월 11일, 2차 구금하였다. 구금 되기 전에 일제로부터 항일운동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자,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며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 일제는 최익현, 김학진 양인을 석방한 뒤에도 그를 4개월 동안이나 헌병사령부에 구금하였 으나, 그는 이에 조금도 굴함이 없었다. 이에 일제는 하는 수 없이 7월 13일 헌병의 감호하 에 강제 귀향 조치시켰다. 허위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 경상, 충청, 전라 3도의 교계(交界)인 삼도봉(三道峰) 밑의 지 례(知禮) 두대동(頭岱洞)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하에 은거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오조약 늑결 소식을 듣게 되었다.10) 이때부터 허위는 경상, 전라, 강원, 경기 각지를 돌며 전국의 동지, 지사들과 앞으로의 대 처방안을 모색하면서 의병항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만났던 인물들로는 면우 (  宇) 곽종석(郭鍾錫), 이학균(李學均), 유인석(柳麟錫) 등이 있다. 또한 그는 이 즈음 영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