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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6월 14일,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文達煥), 임현주 (林顯周), 유종규,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 나기덕(羅基德), 이용길, 유해용 (柳海瑢) 등 13인의 의사들은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항전은 종막을 고하 고 말았다. 며칠 뒤 이들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사들은 여기서 그들의 심문과 회유를 받는 동안에도 일제의 죄상을 성토하는 등 의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두 달 남짓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 월 하순 일본의 대마도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적국에서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홍주의병진의 유준근(柳濬根), 이식(李 ) 등 9의사가 이미 감금되어 있어 이들과 같이 대한의 의사로서 높은 의기를 보여 주었다. 최익현은 일제측의 갖은 협박과 회 유를 뿌리치고 단식, 1907년 1월 1일 마침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임병찬에게 <유소(遺疏)>를 구술, 다음과 같은 여한(餘恨)을 남겼다.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 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 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13)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부산 초량(草梁)에 닿았다.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 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앞세운 그의 영구(靈柩)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구포, 성주, 황간, 공주 등지를 지나 초량을 떠난 지 15일만에야 청양의 본가에 도 착, 망국민의 통분 속에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각 주 1) 최익현(崔益鉉) : 《면암집(勉菴集) 3》(민족문화추진회, 1978), pp.1∼13. 2) 최익현(崔益鉉)의 이 <오불가소(五不可疏)>는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성재(省齋 ) 유중교(柳重敎) 문도(門徒) 47명이 연명으로 올린 연명유소와 그 내용상으로는 대동소이하 나, 이것이 재야유자의 입장을 대변한 것인데 비해 최익현의 상소는 관인의 입장에서 올려 진 것인 만큼 그 의의는 각기 상이하다고 하겠다. (본서 <유인석(柳麟錫)> 항목 참조) 3) 《면암집(勉菴集) 1》, p.135 참조. 4) 위의 책, p.144 참조. 5) 위의 책, p.217 참조. 6) 위의 책, p.229 참조. 7) 위의 책, p.235 참조. 8) 노성 궐리사는 현재 논산군 노성면 궐리에 소재한 소론의 영수(領袖) 윤증(尹拯)의 고택 (古宅)과 이웃한 노성향교(魯城鄕校)를 말한다. 9) 최제학(崔濟學) 편(編) : <면암선생창의전말(勉菴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獨 立運動史資料集)2》, 보훈처, 1971), pp.65∼75. 10) 위의 책, p.75 및 《면암집(勉菴集) 3》, <연보(年譜)>, pp.171∼172 참조. 11) 《면암집(勉菴集) 2》, 잡저(雜著), <기일본정부(奇日本政府)>, pp.223∼224. 12) 《면암집(勉菴集) 3》, <연보(年譜)>, p.184 및 송상도(宋相燾) : 《기려수필(騎驢隨 筆)》(국사편찬위원회, 1955), p.101 참조. 13) 《면암집(勉菴集) 3》, <연보(年譜)>, p.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