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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한 음모를 탐지한 최익현은 이건용을 의리로 타일러 오히려 그를 의병진에 가담토록 해서 전부장(前部長)으로 삼아 모병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이처럼 최익현 의병진은 거의 후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호남 각지를 행군하면서 무기 와 군사를 모아 거의 초기에 80여명에 지나지 않던 병력이 이때에 와서는 9백여명에 달했 고, 그중 상당수가 소총 등의 화기를 소지하게 되어 전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그러나, 그보 다도 중요한 점은 호남 일대가 최익현 의병의 활동 이후 의기로 가득차 의병진의 사기가 한 층 고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6월 11일 아침,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의병해산을 명하는 광무황제의 선유조칙과 관찰사 고시문을 최익현에게 보내와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물론 최익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일제통감부의 괴뢰로 전락한 정부에서는 전주관찰사 한진창에게 전북지 방 진위대를 동원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6월 11일 순창 외곽을 봉쇄하여 읍의 북쪽인 금산(錦山)에는 전주진위대가, 동쪽 인 대동산(大同山)에는 남원진위대가 각각 포진하여 읍내 관아의 객관(客館)을 중심으로 포 진하고 있던 의병진을 압박해 왔던 것이다. 최익현은 처음에 이들이 일군인줄 알고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었다. 그러나 얼마뒤 척후 병의 보고로 이들이 일군이 아니라 동족인 진위대 군사임을 알고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 기 위해 진위대측에 다음과 같은 간곡한 통첩을 보냈다.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리함으로써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 으리라.12) 그러나, 양진위대는 최익현의 이와 같은 호소를 묵살한 채 오히려 의병진의 피전(避戰)자 세를 역이용해 일제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의병측은 이미 '동포끼리는 싸워서는 안된다'고 사 생취의(捨生取義)를 결행, 응전없는 상태에서 맹공을 받게 되자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일시에 진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에 최익현은 주위를 돌아보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은 모두 떠나라"고 하며 지휘부가 있던 순창 객관 연청(椽廳)에 그대로 눌러 앉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자가 2 2 명이었다. 진위대는 의병측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자 사격을 중지하고 지휘소를 에워싼 채 그대로 밤을 지냈다. <최익현 의병 진격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