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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 마련하였다.9) 마침내 1906년 6월 4일 아침, 그때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최익현 은 최제학(崔濟學), 고석진(高石鎭) 등 문인 수십명을 거느리고 무성서원에 도착, 강회를 연 뒤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사생을 맹세하였다.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약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 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10) 이에 모든 회중(會衆)이 흔연히 사생을 맹세하니, 최익현은 드디어 거의를 천명하였다. 그 즉시로 80여명이 대오를 편성한 뒤 태인 본읍을 향해 행군을 개시하였다. 이때 최익현의 나 이 74세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성(性)이라 하고 신의를 지키고 의리를 밝히는 것 은 도(道)라고 한다. 사람으로 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이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노생의 범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개화열국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버리 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제 우선 귀국(일본)이 신의를 저버린 죄를 논한 다음에 귀국이 반드시 망하게 되고 동 양의 화가 그칠 때가 없게 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의 호남의병진이 무성서원에서 거의한 당일에 태인 본읍으로 진군 한 뒤 향교에서 잠시 유진할 때에 발표된 최익현의 <기일본정부서(奇日本政府書)>의 일단이 다.11) 이 글은 이어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조선에 대해 '기의배신'(棄義背信)한 일제의 죄 상을 16가지로 나누어 조목조목 논술하여 한일 양국을 위해, 나아가서는 동양평화를 위해 일제의 각성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앞서 최익현 의병진이 태인 본읍으로 진군해 오자,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저항은 엄두도 못내고 도망쳤다. 따라서 의병은 무혈로 태인을 점령하였고, 최익현은 향교로 들어가 명륜 당에 좌정하고 향장(鄕長)과 수서기(首書記)를 불러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는 한편, 군사들을 모아 의병진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이튿날 아침 그곳을 출발한 의병진은 30여리를 행군, 당일 하오 정읍에 당도하였다. 군수 송종면(宋鍾冕)의 항복을 받은 의병진은 이곳에서 소총 등의 무기류와 병력을 확보한 다음 다시 행군, 30여 리 떨어진 내장사(內藏寺)로 들어갔다. 이때 흥덕(興德) 선비 고석진(高石鎭)이 김재구(金在龜), 강종회(姜鍾會) 등과 함께 전투력 이 뛰어난 포군 30여명을 거느리고 합세해와 의병진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이튿날 아침 내장사 뜰에서 좌, 우익을 갈라 잠시 군사를 조련한 다음 30여 리를 행군 , 지세가 험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던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구암사에서 그날 밤을 지낸 의병진은 다음날 첫새벽에 빗속을 행군, 정오경에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많은 주민들과 이속들이 나와 의병들을 환영하였으며, 군수 이건용(李建鎔)은 최 익현 앞에 나아가 항복했다. 이를 전후해서 채영찬(蔡永贊), 황균창(黃均昌), 김갑술(金甲 述), 양윤숙(楊允淑) 등이 인근 각지에서 포군을 거느리고 합류해와 의병진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최익현은 여기서 의병진을 재정비하고 부서를 정해 임병찬을 참모장으로 하고 김기술(金 箕述), 유종규(柳鍾奎), 강종회(姜鍾會), 이동주(李東柱), 이용길(李容吉), 손종궁(孫鍾弓), 정 시해(鄭時海) 등을 부장으로 각기 임명,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즈음 전주경무고문지부(全 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기도 하였으나 의병은 이들을 일거에 격퇴시켰다. 그후 의병진은 그곳 순창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인 6월 8일 남원으로 진출코자 행군, 정오 무렵 50여 리 떨어진 곡성에 당도,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稅錢), 양곡 등을 접수하 였다. 그곳 군수 송진옥(宋振玉) 역시 의병진을 영접하였고, 또 주민들도 적극 협조해 왔다 . 그러나, 남원에는 이미 의병의 공격에 대비, 방어태세가 견고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이튿날 의병진은 다시 순창으로 회군하였다. 의병에 합세하려는 삼방(三坊)포군 1백여명이 구암사 와 백양사(白羊寺)에 주둔하고 있다는 전갈도 왔기 때문이다. 이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순창군수 이건용이, 의병진이 곡성으로 진출한 틈을 타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밀통, 의병 '토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