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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 고 외세의존적 개화세력을 견제하면서 민족수난기에 의병항전을 비롯한 항일민족운동에 이 바지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최익현은 순조 33년(1833)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嘉 里)에서 선비 최대(崔岱)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랑이 머리에 제비의 턱'(호두연함(虎頭燕 ))이라는 귀상(貴相)을 타고 난 그는 어려서 유달리 총명하여 아명을 '기남'(奇男)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유년시절부터 가세가 넉넉치 못한 까닭에 삶의 터전을 찾아 단양, 양평 등지에 옮겨 살다가 22세 되던 해 에 다시 포천으로 돌아왔다.1) 최익현은 양평에 살던 시절 14세의 나이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감으 로써 일생의 큰 전기를 마련하였다. 화서는 최익현에게 '면암'(勉菴)이란 호를 지어 주고 '낙 경민직'(洛敬 直)이란 글을 주면서 학문을 권면하였다. 이로부터 최익현은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받아 위정척사의 '구국부도'(救國扶道)의 의리를 구현시키고자 온 생애를 바쳤다. 최익현은 23세에 명경과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정랑(吏曺正郞), 신창현감(新昌縣監)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강직과 선정(善政)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최익현이 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10년 동안 국왕의 생부로 집권해온 대원군의 강력정치와 집권명분을 탄핵, 그를 끝내 실각 시켜 '봉명조양'(鳳鳴朝陽)이란 찬사를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그도 또한 '왕실의 골육 을 이간시킨' 죄목으로 2년간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도 하였다. 최익현의 정치적 진면목은 그후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개항오불가(開港五不可)의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2)는 일제의 강압과 정부의 수교방침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그 무렵 모든 개항반대상소 중에서도 백미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상소는 외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흑산도로 4년간 또다시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최익현이 반대한 개항 후의 사태는 개화, 주화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근대문물을 앞세운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침략으로 나타나 그의 예견은 적중한 것이었다. 특히 일제의 경제적 진출은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고 그에 더하여 정치적, 군사적 침략이 강화되어 경향(京鄕)의 백성이 정부의 개화시책을 비판하는 속에서 위정척사의 배일운동이 정계의 주 류를 이루게까지 되었다. 최익현은 이와 같은 정계의 흐름 속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척사운동에 앞장서 국민 의 자주의식을 고조시키고 외세의존세력을 규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1894년의 갑오경장과 그를 이은 단발령에서는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외세의 내정 간섭의 부당성을 성토하였다.3) 또한 을미사변과 그 전후 갑오, 을미년의 의병항전에서는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도리어 '진 회대죄소'(陳懷待罪疏)를 올려 의병들을 "모두 충성과 의리를 앞세운 백성들"이라 일컬어 거 의구국의 정당성을 밝혔다.4) 그뒤 그는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제의 군사적 국권침탈을 보고 서는 '궐외대명소'(闕外待命疏)를 올려 외세의 척결과 국권수호의 방책을 역진하였다.5) 최익현의 역사적 평가는 이와 같은 위정척사운동에서 발전하여 그 스스로 70세가 넘은 노구를 무릅쓰고 직접 의병진을 편성, 항일구국전을 전개하였다는 점에 보다 비중이 클 것 이다. 최익현은 을사오조사약의 늑결을 국망으로 간주하여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6)와 '창의 토적소'(倡義討賊疏)7)를 올려 민족의 구국진로를 밝히고 의병항일전을 천명하였다. 그의 이 거의는 충남 홍주의 민종식(閔宗植) 의병진과 공동항쟁할 호남의병진의 편성으로 나타났다 . 최익현은 1906년 1월에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8)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회를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 단결해서 국권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의 모 임에는 1896년 진주의병진에서 활약했던 경남 합천의 명유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가 1 0 여명의 지사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제천에서 거의한 유인석의 거의에서도 그러하였 듯이 이 강회가 항일의지를 결집시키는, 의병항전의 준비단계였던 것이다. 이를 이어 그 다음달에는 전북 태인의 종석산(鍾石山) 밑에 우거하던 임병찬(林炳瓚)을 찾 아가 구체적인 거의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거의 장소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정한뒤, 최익현은 담양의 용추사(龍湫寺)로 내려가 기우만(奇宇萬), 이항선(李恒善), 장제세(張濟世), 조안국(趙安國) 등 호남의 명유지사 50여명과 회동, 항전 방책을 논의하고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동맹록(同盟錄)>까지 작 성하는 한편, 순천, 낙안(樂安),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 등 호 남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 거의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의병의 군율(軍律), 의복제 도(衣服制度), 규칙(規則) 등을 작성하고, 임병찬이 주관이 되어 무기를 비롯한 각종 군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