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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강창의록(雲崗倡義錄)》, p.278). 13) 《의병항쟁사(義兵抗爭史)》, pp.261∼265 참조. 14) 《해동의사운강이강년선생약사(海東義士雲崗李康秊先生略史)》, pp.33. "환자태무정(丸 子太無情) 과상지불행( 傷止不行) 약중심복나(若中心服裸) 무욕도요경(無辱到瑤京)" 15) 송상도(宋相燾) : 《기려수필(騎驢隨筆)》, pp.124∼125. 가운데 인용구의 출전은 《논 어(論語)》권(卷)6 <옹야(雍也)>장(章)으로 그 원문은 "자왈(子曰)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 ) 망지생야(罔之生也) 행이면(幸而免)"이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삶을 극단적으로 경계하는 말 이다. 16) 《운강창의록(雲崗倡義錄)》, p.283. 17)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8년 10월 15일자, <결장자승재서대략(訣長子承宰書 大略)>, <결종제서대략(訣從弟書大略)> 및 《해동의사운강이강년선생약사(海東義士雲崗李康 秊先生略史)》, pp.38∼39 참조 . 18) 《운강창의록(雲崗倡義錄)》, <고결팔성동지(告訣八城同志)>, p.295. "(상략(上略)) 강년 병이소격(康秊秉 所激) 안주부득(按住不得) 자병신이래십삼재(自丙申以來十三載) 재거의기 (再擧義旗) 말혈치토(沫血致討) 대전삼십여(大戰三十餘) 살득적추백여급(殺得賊酋百餘級) 불 행어금년유월사일(不幸於今年六月四日) 시진도궁(矢盡道窮) 중환이피금(中丸而被擒) 구욕옥 중(久辱獄中) 금장수사(今將受死) 신순존양지의(身殉尊攘之義) 수가일일유어이자(雖加一日愈 於已者) 금언이의(今焉已矣) 오장내하(吾將奈何) 만망첨군자(萬望僉君子) 물위적세학염(勿爲 賊勢虐焰) 소좌익돈강상(所挫益敦綱常) 말혈상담(沫血嘗膽) 이준래복(以竣來復) 강년피로임 사(康秊被虜臨死) 불승통분(不勝痛憤) 게시애곡(揭示哀曲) 사망재배(四望再拜)" 최익현(崔益鉉) 구한말 개화와 외압의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 가운데 면암(勉 ) 최익현(崔益 鉉)만큼 그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된 사람도 흔치 않다. 이는 개항을 전후해서는 화서학파 (華西學派)를 상징하는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로서, 나아가 일제에 의한 국망(國亡)에 직면해서는 항일의병의 표상으로서 충군애국을 구현하는 역사적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한 결 과로도 생각된다. '5백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또한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 는 것이 어찌 충의(忠義)의 혼이 되는 것만 같겠는가' 또는 '두가단(頭可斷)이나 발불가단(髮 不可斷)'이라는 등의 최익현의 거두절미된 어록만으로는 그의 사상의 본질을 이해하기가 힘 들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얼핏 보면 근대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의 큰 조류를 역행하는 성리학적 전통질서의 재확립에 이념을 두고 개화를 거부하고 제국주의 침략에 도전하는 위 정척사론과 그를 구현하려는 의병항전의 일관된 의지와 행동에서 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 다. 최익현의 위정척사론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중화사상의 테두리 속에 머물 러 있어 중국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이나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개조란 용납될 수 없었다. 그 러므로 그에게는 개화된 일본도, 금수시(禽獸視)하는 서구 각국과 다를 바 없었으며, 또한 전통적 왕조 질서를 뒤흔들려는 동학(東學)도 '동비'(東匪)로밖에 간주되지 않았다. 또한 조 선의 국왕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皇帝)로 격상되는 것을 옳게 여기지도 않았다. 최익현의 사상은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침략의 성격와 그 영향 등에 대 해서 탁월한 식견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 발전의 기본 원칙인 자주성에 남다른 신념을 가졌다. 그것은 차라리 그의 역사적 통찰력과 충군애국의 정신력의 소치일 것이다 .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한말의 한 보수지식인의 뛰어난 사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격동변 혁하는 현실에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려는 주인의식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그의 행적은 제국주의 외압에 저항하는 한민족에게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을 굳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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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