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 7 - 단당해 물자조달에 어려움이 커 더 이상 충주성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유인석 의병진 은 하는 수 없이 20여일만인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하고 말았다.   유인석의 호좌의병진이 제천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문경의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영춘(永春)의 권호선(權 灝善), 원주의 한동직(韓東直), 횡성의 이명로(李明魯) 등의 의병장들이 각기 한 부대를 거 느리고 유인석 의병진에 합류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인석 의병진은 이후 5월 26일 제 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수안보, 가흥, 음성, 단양 등지에서 관, 일군과 활발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유인석이 충주, 제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항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중앙의 정국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을미사변 이래로 친일내각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 긍하던 고종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서 중앙군이 지방으로 출동한 틈을 타 1896년 2월 1 1 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이범진(李範晋), 이완용(李完用) 등을 중심으로 친러내각이 조직되었다. 새 내각은 그 동안 흩어진 민심을 수습코자 단발령을 철회해 각인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한편, 각 지방으로 선 유위원(宣諭委員)을 파견해 의병을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이 무렵, 의병진 내부에서도 항전이 장기화되자 규율이 점차 해이해져 "의병진의 직위를 권좌로 알고 참모, 종사를 조정의 관작처럼 구해 붕당, 반목하여 군중의 분위기가 빙판처럼 싸늘한" 실정이었다.18)   중앙에서 파견된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은 남한산성 의병진을 격파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유인석의 호좌의병진에 압박을 가해 왔다. 단발령이 철회되고 을미사변의 원흉으로 지목되던 김홍집 이하 친일파들이 축출된 처지에는 거의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인석은 정부가 망국적 '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 는 한, 특히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19)    장기렴의 관군은 마침내 5월 26일을 기해 의병측에 대규모 공세를 가해 왔다. 의병들은 이들을 맞아 용전분투하였으나 일기 불순과 전력의 열세로 결국 제천성을 내주고 말았다 . 이날의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와 그의 제자인 홍사구(洪思九)가 전사해 의병진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유인석 의병진은 이 제천전투에서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어 그 동안 공세 를 취하던 입장에서 이후로는 줄곧 수세로 몰리게 되었다. 그날의 처절했던 패주 상황을 이 소응(李昭應)은 다음과 같은 시로서 술회하고 있다. 폭풍이 사납게 몰아치던 그날 군사들은 싸울 마음 사라졌도다 충의로 떨쳐서 일어선 우리 예리한 적의 병기 어찌 막으리 흉악한 칼날은 피하기 어려워 쫓기는 말발굽 급하기만 하구나 산은 첩첩 길은 갈래 갈래 기병도 보병도 뿔뿔히 흩어졌도다 하루 이틀 이리 저리 방황하여도 대진이 간 곳은 알 길이 없네 이윽고 들어간 곳 산은 백양산(白楊山) 근일의 일들을 아뢰인 다음 발길을 돌렸네 수춘산(壽春山)으로 동지들이 잠시 동안 의논한 후에 비로소 들었네 전하는 말을 대진의 주둔지는 단양이라네(하략)20)   최후의 거점이던 제천성마저 상실한 유인석 의병진은 일단 단양에 모여 전열을 수습하였 다. 그러나, 그 동안의 항전에서 인력과 전력이 너무 크게 소모되었기 때문에 장기지속적인 항쟁을 펼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를 위해 유인석은 서 북행을 결심하였다. 일찌부터 서북지방(황해, 평안도)의 '강용지병(强勇之兵)'에 착안하고 있 던 그는 벌써 유치경(兪致慶), 이필희, 정화용(鄭華鎔) 등을 모병을 위해 그곳에 파견해 놓 고 있었다.21)   단양을 떠나 풍기, 영춘, 충주, 음성, 괴산, 원주 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