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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음을 면했을 따름이라'한 말을 어찌 의심하리요"라고 말해 자신의 사후에도 항일전이 부단 히 이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15) <이강년 의병 주요활동지역> 그후 그는 수원을 거쳐 7월 8일 서울의 일군사령부로 압송되었고, 19일에는 다시 평리원 (平理院)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일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그는, "보고 싶은 자 는 이등(伊藤)뿐이다. 너희 무리와는 말하지 않겠다."고 크게 호령하고, 또 평리원에서 원장 박제선(朴濟璿)이 거의한 이유를 물었을 때에도 '더러운 자'와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글로서 답하였다. 내가 거의한 것은 먼저 5적과 7적을 단죄하고 왜적을 박멸해 위로 나라의 철천지 원수를 갚고 아래로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하고자 함에서였다.16) 그리고는 그를 향해 개, 돼지만도 못한 자라고 호통을 쳤다. 그뒤 이강년은 9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오전 10시에 51세를 일기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는 죽기에 앞서 장자 승재(承宰)와 종제 강수(康壽) 및 전국의 의병 들에게 다음과 같은 고결문(告訣文)을 남겼다. 다음은 죽음을 앞둔 열사의 의연한 기개를 담은 이 글의 요지이다. 너의 아비는 평생에 혈충(血衷)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