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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나, 일군이 기습공격을 가해와 참모 원하정(元荷汀)·신숙(申 )·신명희(申明熙), 소모장 이중 봉(李重鳳) 등 10여명의 유위(有爲)한 인물들이 포로로 잡히는 등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부 근의 방두사(旁杜寺)에서 잠시 요양하고 있던 이강년은 그 비보를 듣자,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은 참패를 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탄식했다 한다.10) 그리하여 이강년 부대는 진로를 바꾸어 평창 대화(大和)를 거쳐 태백산맥을 따라 북상하 여, 홍천 동쪽의 괘석리-삽교를 지나 화천(華川) 간척리(看尺里)로 진출한 뒤, 1908년 1월 8일 드디어 경기도인 가평 서북방의 용소동(龍沼洞)에 도착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천신만고 끝에 경기지역에 당도하였지만, 목적지 양평으로의 진군은 여의치 가 않았다. 계속된 행군으로 의병들은 피로해졌으며, 또 일군의 공격으로 더 이상 행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용소동 부근을 전전하며 간간이 일군과 교전을 벌인 뒤, 이강년은 4월 초순에 하는 수 없이 강원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즉 화천 간척리, 인제를 거쳐 4월 10일에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백담사에서 이강년은 일군과 격전을 벌여 일대 승첩을 올렸다. 즉 일군추격대 5백여명이 4 월 13일 백담사로 접근하자, 이강년은 전군을 지휘, 이들을 맞아 반나절 동안이나 접전을 벌여 결정적 타격을 가하였던 것이다.11) 이어 이강년은 부대를 신흥사(神興寺)로 옮겼다가 오세암(五歲菴)을 경유하여 양양, 강릉 지역으로 내려갔다. 그후 경상도로 내려가 항전을 계속할 생각으로 이강년은 태백산 줄기를 따라 남하, 영월 상동(上東)의 운기리(雲基里)에 당도하였다. 이때 마침 백남규, 권용일 양인 이 그동안 모집한 4천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본진에 합류해와 의병들의 사기가 한층 고무되 었다.12) 이강년은 새로운 활동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재차 서벽(西壁)으로 남하하였다. 이때 영 주수비대 소속 일군이 서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선봉장 백남규, 권용일 과 우군장 변학기 등으로 하여금 길목을 지키게 하고 성익현(成益賢)의 삼척의병이 이들을 지원토록 하여 일본군을 포위 섬멸시켰다. 그는 승세를 몰아 서벽 남쪽의 내성(乃城)으로 진격,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역시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에는 재산(才山)으로 신속히 철수하였다. 그러자, 예안(禮安)수비대 소속 일군이 의병을 추격, 재산(才山)을 향해 다가왔다. 이에 이 강년은 주변 요로에 군사들을 배치시킨 다음 이들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군은 위장 전술을 펴 '의병대진'(義兵大陣)이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다가왔다. 이강년 의병은 이들을 맞아 집중사격을 가한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이후 황지, 상동, 제천, 평창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그 동안 의 연전으로 인해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있었다. 더욱이, 6월 28일에는 평창 부근의 사자산 (獅子山)에서 원주수비대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어 이 일대에서는 더 이상 항전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13) 이강년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새로운 활동근거지를 마련코자 영월을 거쳐 청풍으로 남하 하던 중 작성(鵲城)에 잠시 유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의병의 동정을 파악한 제천수비대 소 속의 일군이 이곳으로 진격해 왔다. 이강년 부대는 이들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 전세가 기울어 도선봉 하한서(河漢瑞) 등을 비롯한 주요간부들은 전사하고, 이강년은 왼쪽 발목에 총탄이 적중, 행보를 옮기지 못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태백산맥을 중심무 대로 경상, 충청, 강원 일대에서 의성(義聲)을 드날리던 이강년 의병부대는 와해되고 말았 다. 7월 2일의 일이다. 그는 이때 다음과 같은 애절한 시를 남겨 후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 다. 무정하다 탄환이여 발목을 상하여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욕보지 않고 요경(瑤京)에 갈 것을14) 그는 적에게 잡혀서도 의병장으로서의 기개를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체포 직후 일군들이 상처를 치료하려하자,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한다. 충주에 감금되었을 적에는 주민과 이속(吏屬)에게, "그대들은 나 를 아는가? 내가 거의한 이유는 토적복수(討賊復讐)코자 함에 있었다. 지금 불행히도 포로 가 되었으니 반드시 죽게 될 것이나, 이후 나보다 더욱 유위(有爲)한 인물들이 반드시 등장 하리라. 성인의 이른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곧을 직(直)이니 거짓으로 사는 것은 다만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