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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 들을 독려하였다고 전한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신이 권세를 농락하여 4천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 의 수중으로 넘어갔도다. 생각하면 실날같은 나의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여기에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칠로(七路)에 권송(勸送)하니, 양가 (良家)의 재자(才子)로 각기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소모장(召募將)에 임명하여 인부(印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어 파출 (罷出)하고 처분하여 강토를 보전하고 사직을 수호함에 목숨을 다하여라. 조서를 비밀히 내리는 것이니 그리 알고 모든 일을 거행하라.5) 이로써 의병들은 더욱 의기 충천, 일사보국의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한다. 이강년 부대는 민긍호 부대와 연합전선을 펴 충청북도 관찰부 소재지인 충주 공략에 나섰 다. 이강년이 제천-청풍-충주로, 민긍호가 제천-주포-충주로 각각 길을 나누어 충주를 향 해 진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강년은 8월 23일 충주에 도착, 성 안의 동정을 살피며 공성(攻城)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민긍호는 충주를 향해 진군하던 중 박달재에서 일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게 되었기 때문에 충주 공략에 합세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강년은 단독 으로 충주공략전을 벌였으나, 일군 2개 소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끝내 실패하고 말았 다. 이에 그는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 경북의 풍기, 문경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 는 여주의 김현규(金賢圭) 의병부대와 합류한 뒤,6) 조령과 문경 서쪽의 이화령(梨花嶺)에 병력을 배치, 일군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한편, 경상, 충청 양도의 관문인 문경이 의병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일군은 이 일대 에 대한 의병 '토벌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일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 해 문경 동북쪽의 갈평(葛坪)으로 이동하였다. 일군이 그곳까지 의병을 추격해옴에 미쳐, 이 강년은 우선봉 백남규(白南圭), 좌선봉 하한서(河漢瑞), 우군선봉 권용일(權用佾), 도총독장 이만원(李萬源) 등을 충동시켜 이들을 단숨에 격파한 다음 단양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일군 의 추격이 계속되자, 이강년 부대는 다시 영춘으로 이동, 그곳의 이명상(李明相) 부대와 청 풍의 조동교(趙東敎) 부대를 합병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모장 원건상(元建常)이 삼척지방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합류해와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7) 9월 25일 이강년 부대는, 적성(赤城)을 거쳐 추격을 계속해온 일군 일개 중대를 맞아 영 춘에서 교전을 벌인 뒤 다시 영월로 북상을 계속하였다. 그곳에서 10월 6일 일군수비대와 또 한차례 격전을 벌이고 다시 영춘으로 남하하여 남한강을 건너 임현(任縣), 신평(新坪)을 지나 제천 송한(宋寒)으로 나아갔다. 이강년 부대는 배양산(培陽山)으로 이동하던 중에 10월 21일 강원도 선유사 홍우철(洪祐 哲) 일행이 원주에서 주천(酒川)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강년은 백남규 , 권용일이 이끄는 의병을 상유치(上杻峙)에 매복시켜, 일군의 호위를 받으며 상유치에 당도 한 선유사 일행을 기습,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홍우철은 간신히 원주로 되돌아 갔다. 이강 년 부대는 임현(任縣), 단양을 지나 죽령으로 남하한 다음, 일군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면 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8) 의병이 교통요로인 죽령에 다시 출현하게 되자, 일군은 죽령 방면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의병을 제압하려 하였다. 이에 11월 10일 죽령에서 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강년 부 대는 소백산을 거쳐 재차 영춘-의풍(義豊)-고치령(高峙嶺)을 지나 순흥(順興) 공략에 나섰 다. 여기에는 울진 일대에서 용맹을 떨치며 이곳까지 진출한 신돌석(申乭石) 의병도 동참하 였다. 두 부대는 순흥의 일군분견소, 경찰서 등을 파괴한 다음, 이강년은 의풍(義豊)으로 , 신돌석은 서벽(西壁)으로 각기 퇴각하였다.9) 의풍으로 퇴각한 이강년은 해산군인으로 의병부대에 합류해 온 변학기(邊鶴基)를 우군장 으로 임명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영춘으로 남하해 갔다. 그러나 11월 26일 영춘 동 쪽에서 일군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게 되었으나, 종사(從事) 주범순(朱範淳)·정겸동(鄭 童 ) 이 전사하는 등 의병측의 패배로 돌아갔다. 이에 이강년은 일군과의 조우를 피하면서 죽령 으로 남하, 그 일대를 전전하면서 도총독장 이만원, 소모장 이중봉, 선봉장 권용일 등과 함 께 흩어진 병력을 모아 전열을 수습해 나갔다. 그뒤 이강년은 12월에 경기 지역을 향해 북상길에 올랐다. 단양을 지나 제천으로 향하던 중 이강년이 병을 얻어 12월에 16일 전군이 임현(任縣) 부근에서 잠시 유진하게 되었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