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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9. 3병두(屛杜)   순검1   9. 6연풍(延豊)   4   9. 16제천 유치(杻峙)    일군 200여명을 사로잡는 대승 9. 27죽령(竹嶺)  130   10. 1죽령    일군 200여명을 사로잡는 대승 10. 2 응암(鷹岩)       10. 5 단양 고리평(故 里坪)  수십명  일군 80여명을 사로잡다. 10. 6 소백산정(小白山 頂)     전황 불리 10. 10순흥(順興)     순흥의 일군을 습격 10. 21 유치(愈峙)     패전 10. 23 풍기 백자동(栢 子洞) 3   일군 100여명을 사로잡다. 10. 25피화리(避禍里)    패전 11. 12복상동(復上洞)710  대패 11. 21 전동 월계봉(錢 洞月桂峯)   32  12. 3 낭천 간척리(看 尺里)  24   12. 5 경기도 건천(乾 川)   3   1908. 2. 17 경기도 용소동 (龍沼洞)     일군 100여명을 사로잡다. 2. 20 경기도 대청리 (待淸里)       2. 26 경기도 갈기동 (葛基洞)     일군을 유인한 뒤 격파 3. 12 인제 백담사(百 潭寺) 수십  수백 명    3. 30강릉(江陵)근방수명   전황 불리 4. 1하사동(下寺洞)      4. 3홍천 북면      4. 4 양양성외(襄陽城 外)     참획심중(斬獲甚衆) ? 안동 서벽(西壁)    일군 수백여명을 사로잡다. 4. 6봉화 내성(乃城)      4. 8안동 재산(才山) 10 여명 8    5. 23 제천 오미리(五 美里)    민간 인2  일군을 유인한 뒤 격파 6. 4청풍 작성(鵲城)7   이강년 피체 거의(擧義) 초에 의병들을 규합한 뒤 영춘(永春)의 용소동(龍沼洞)에 잠시 유진하였을 때의 일이다. 의병들의 동정을 알아차린 순검과 일군들이 야밤에 기습공격을 가해옴에 의병들은 모두 산패하고, 이강년만이 단신으로 이들과 대항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그를 향해 세 번 이나 사격을 가하였으나, 그때마다 불발에 그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적들은 " 이는 하늘이 돕는 자이다!"라고 외치며 도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강 년은 왼쪽 뺨의 살점이 손바닥 만큼이나 떨어져 나가는 큰 부상을 당하였다. 그 이후로 얼 굴의 흉터만 보고도 이강년임을 알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4) 그뒤 1907년 7월 광무황제가 강제퇴위되고 이어 군대해산이 단행되자, 이강년은 민긍호 가 이끄는 원주진위대의 의병진과 연합전선을 구축, 이후 항일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강년과 민긍호는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 일대에 걸쳐 용맹을 떨치던 양대 의병장으로 일제 군경들이 크게 두려워하던 인물이 되었던 것이 다. 이들이 순국한 이후 이 일대에서의 의병항전이 쇠퇴된 점을 보더라도 그들의 활약상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강년이 재거(再擧)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광무황제는 전판서 심상훈(沈相薰)을 은 밀히 보내 이강년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밀조(密詔)를 내려 의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