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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날짜(음) 격 전 지 의병측 일군측 비 고 사 상 사 상 1907 7.7 제천(堤川)   500여13  ?풍기 도촌(道村)    일진회원 등 2명 처단 7. 30 문경 주흘루(主 屹樓)아래     일군을 공격했으나 밤에 달아남. 8. 2 문경 모항령(毛 項嶺)     좌우 선봉이 일군 공격 8. 3문경 갈평(葛坪)    대승·시만산야(屍滿山野) 8. 4문경 갈평 3    8. 6 문경 대성사(大 成寺)   8   8. 8문경 적성(赤城) 수명36 후군장 신태원 (申泰元) 전패 8. 18단양 유치(楡峙)      8. 27영월(寧越)     전황 불리. 8. 29 영월덕포독산(德 浦獨山)       리고 수안보의 일군병참을 공격하였다. 2월 13일에는 다시 9초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尹 基榮)과 함께 문경 평천(枰川)으로 진군, 조령의 요로를 지켜 문경에 주둔한 일군들의 행로 를 차단시켰다. 이는, 유인석 의진의 소모장 서상렬(徐相烈)이 조령 밖에서 상주 태봉의 일 군병참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그 작전을 도와 문경에 주둔한 일군의 진로를 봉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문경에 주둔해 있던 한달 동안 그는 집에서 오는 서신조차 읽지 않고 군무 (軍務)에만 전심했다고 한다. 그해 5월 호좌의병진은 선유사(宣諭使),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리는 관군의 공격을 받고 최후의 거점이던 제천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유인석은 거수지계(去守之計)를 정하고 동지들과 더불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때 후군장(後軍將)을 맡았던 이강 년도 스승 유인석의 뒤를 쫓아 망명하려 하였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부득이 소백산으 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소백산에서 의병진을 해산시킨 그는 단양 금 채동(金采洞)으로 들어가 얼마간 노모를 모시고 은신하였다. 이듬해 1897년 5월 이강년은 전년에 망명한 스승 유인석을 만나기 위해 단신으로 서간도 로 들어갔다. 이곳에서도 그는 그해 7월 귀국 때까지 장백(長白), 무송(撫松), 임강현(臨江 懸) 등지를 전전하며 유인석, 조병준(趙秉準) 등과 함께 항일애국투쟁을 벌였다.2) 유인석의 학문과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고 그해 7월 단양 금채동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호남, 영남 각지를 유람하며 이름난 선비들을 찾아 성리(性理), 전고(典故), 예악(禮樂) 등에 대한 토론 을 통하여 자기 수양에 진력하였다. 또한 1899년 충주 유림에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 의 문집을 간행할 때 그는 이에 적극 협력, 호남으로 가 문집 출판의 일을 의논하기도 하였 으며, 그후 문집이 완간되자 평안북도 태천(泰川)까지 가 문집을 배부하는 등 화서학파의 역사(役事)에 중추적 역할을 담임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가 아마 그의 일생을 통해 학문적 성숙도가 가장 고조된 때가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동시에 그는 화서학파의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춘추대의(春秋大義)의 존화양이(尊華攘夷)정신에 충분히 접맥되어 항일의 정신적 기 백이 더욱 강렬해질 수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후 일제의 대한침략은 더욱 가속화되어, 1905년 을사오조약 늑결 이후 실질적인 국권 은 일제의 손아귀로 들어가 대한제국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그는 을미의병 때의 동지 안성해(安成海) 등과 함께 1907년 4월 제천에서 재기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이듬해 7월 청 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피체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단양, 제천, 원주, 연풍(延豊), 영 월, 횡성, 강릉, 청풍, 충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안동 등 경북, 강원, 충북 일대를 돌며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의병항쟁사에서 그 명성을 드높이게 되었 다. 그가 이 기간 동안 치뤘던 항일전과 그 전과를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 錄)》에 의거,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3) 이강년(李康秊)의병부대의 항일전력과 그 전과 <1907.7∼19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