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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이 기록에 의하면, 참모장 김상덕(金商悳)은 전사자로 처리되어 있으나, 그는 이때 생존하여 그해 음력 7월에는 평리원(平理院)에 자진 출두하여 진정소(陳情疏)를 올리고 있다. (황현 (黃玹) : 《매천야록(梅泉野錄)》, p.386 참조) 한편, 서울로 압송된 78명은 일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은 뒤 그해 7월에 윤석봉 등 69명은 석방되고 남규진(南奎振), 유준근(柳濬根) , 이식(李 ), 신현두(申鉉斗), 이상구(李相龜), 문석환(文奭煥), 신보균(申輔均), 최상집(崔相 集), 안항식(安恒植) 등 '홍주9의사'는 대마도로 압송, 구금당하게 된다. 12) 한국내부경무국(韓國內部警務局) 편(編) : 앞의 책 ; 《홍성군지(洪城郡誌) 하(下)》 , p.17. 일제에게 빼앗긴 무기들로 미루어 의병측은 구식 대포를 비롯해 주로 화승총으로 무 장하였고 그밖에는 재래의 창과 칼로 무장하는 등 화력면에서 일군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 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3) 민병욱(閔丙郁) : 앞의 글 ; 한국내부경무국 : 앞의 책 참조. 이강년(李康秊) 이강년은 한말 의병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성패를 차치 하고 민족자존심과 주체성이 바탕이 되어 봉기한 한말의병은 대개의 경우 실제적인 전과면 에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이강년과 같이 몇몇의 두드러진 의병의 경우 에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는 한말 무관 출신인 까닭에 군사(軍事)에 밝았을 뿐만 아니 라 용병술에서나 정신적인 무장면에서나 모두 탁월한 인물이었으므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강년은 철종 9년(1858) 경북 문경군 가은면(加恩面) 도태리(道胎里)에서 이기태(李起台 )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낙인(樂仁), 호는 운강(雲崗)이며 전주가 본관이다. 어머니 남씨(南氏)가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꾼 뒤 그를 낳았으므로 아명을 '출양'(出陽)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그는 8척 2촌의 장신에다 특히 용력(勇力)이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 서(兵書)에 조예가 깊어 일찍부터 장재(將才)로 지목되었다. 그뒤 1880년에 23살의 나이로 무과에 합격, 절충장군(折衝將軍) 행룡양위(行龍 衛) 부사 과(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188 4 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짐에 미쳐 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우국 (憂國)의 나날을 보내었다. 뒤이어 일제는 대한침략정책의 일환으로 펼쳐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에 대한 내 정간섭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되어 한국민의 반일감정은 점차 고조되어 갔다. 더욱이 이듬해에는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의 반포라는, 민족적 자긍심에 결정적 타격을 가져다준 큰 사건이 일제와 그의 사주를 받은 부일관료배들에 의해 연이어 발생, 전국적으로 항일의 기운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는 이를 계기로 항일무력투쟁의 대열에 나설 것을 결심하게 되 었다. 이강년은 향리에서 서둘러 거의(擧義)계획을 세웠다. 이때 마침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 ) 의 호좌(湖左)의병진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이를 이어 1896년 1월 11일 (음) 향리인 문경에서 거의, 항일전을 개시하였다. 거의 직후 그는 의병들에게 쫓겨 도망중이던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 순검(巡檢) 이호 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 등 세 사람을 생포,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죄를 물어 처단한 뒤 군중이 운집한 농암(籠巖) 시장에다 효수하였다. 그리고는 안동으로 들어가 그곳의 의병 장 권세연(權世淵)을 만나 군사일을 논의한 다음 되돌아 왔다. 이어 1월 15일에는 고성(姑 城)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고전을 치뤘다.1) 이강년이 의병항쟁을 펼치면서 그 명성을 보다 크게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을미의병의 상 징적 인물이던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과 사제의 관계를 맺으면서부터이다. 즉 그는 1월 29일 그 동안 서신왕래를 통해서 연합전선의 구축을 계획하던 제천의 유인석을 찾아가 막 료(幕僚)의 예를 올리고 동시에 또 군중에서 사제의 의를 맺어 일생동안 그를 스승으로 섬 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遊擊將)에 임명되어 5월 하순 유 인석 의진의 최후의 거점, 제천성이 실함될 때까지 문경 등지에서 많은 활약을 보였다. 2월 1일 유인석의 명을 받아 그는 전군장(前軍將)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6초(哨)의 병력을 거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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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