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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우익장 : 신현두(申鉉斗) 유병장(儒兵將) : 유준근(柳濬根) 유격장 : 채경도(蔡景燾) 돌격장 : 남계원(南啓元) 안병림(安炳琳 ; 안병찬(安炳瓚)의 제(弟)) 소모장 : 지우범(池禹範) 수문장 : 최선재(崔璇在 ; 오위장(五衛將)) 수성장(守城將) : 조병순(趙炳舜) 참 모 : 안병찬(安炳瓚) 박창로(朴昌魯) 안항식(安恒植) 신복균(申復均) 이용규(李容珪) 이식 (李 ) 이처럼 민종식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하여 충청 일대에서 그 기세를 크게 떨치자, 일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홍주성이 의병의 수중에 들어간 지 사 흘째 되던 5월 22일에 일제는 동원(桐原) 경시(警視), 토방(土方) 경부(警部) 및 송규석(宋圭 奭) 총순(總巡) 등으로 하여금 보조원, 순검 수십명을 대동하고 홍주의병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고, 또 환산(丸山) 경찰고문까지도 24일에 증전(增田) 경부 등을 대동하고 서울을 떠나 홍주 일대를 순시한 뒤 28일 귀경하였다.8) 그 가운데 토방(土方), 송규석(宋圭奭) 일행은 27일 홍주성에 도달하였으나, 의병들의 포위 공격을 당해 전멸하고 말았다.9) 이러한 현지사정을 보고받은 일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는 곧 재경성남부수비대 사령관 본조(本條) 소장에게 명령하여 보병 2개 중대를 비롯해 포병, 헌병, 기병대 일부 병 력을 차출해 홍주로 급파토록 했다. 이에 본조(本條)는 서울에 주둔중이던 보병 제60연대의 제1대대장 전중신조(田中新條) 소좌를 책임자로 하는 토벌대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전중 (田中) 대대에서 차출한 보병 2개 중대를 비롯해 기병 1개 소대를 근간으로 하는 '토벌대'는 기관포 2문을 앞세우고 29일 밤 홍주 부근에 당도하였다. 여기에다 공주, 전주 등지에 주둔 하고 있던 헌병, 경찰대 및 한국군 진위대도 가담하게 하였다. 이같이 홍주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의 전력과 규모는 컸던 것이다. 한편, 일제토벌대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성안의 수비태세도 상당히 정비 , 강화되었다. 즉, 29일에는 예산 방면으로부터 곽한일(郭漢一), 남규진(南奎振)이 이끄는 의 병부대가 합세해 오는 등 외부로부터의 지속적인 원조도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동안에 주민 들을 동원하여 성첩을 수축하기도 하고 의진 내부의 결속을 더욱 굳건히 하는 조치도 취해 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25일경부터는 작전부서를 일부 개편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수성(守 城)을 염두에 두고 단행한 조치였다. 이때의 편제는 아래와 같다.10) 대 장 : 민종식 중군장 : 이세영 참모장 : 김상덕(金商悳) 소모장 : 곽한일 향관(餉官) : 민정식(閔廷植) 선봉장 : 정해두 후봉장 : 박영두(朴永斗) 참 모 : 윤석봉(尹錫鳳)·채광묵·이상두(李相斗)·유준근(柳濬根) 일군 혼성토벌대는 기관포 2문을 성의 북쪽에 배치한 뒤 30일 종일 성안의 의병과 4대문 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의병들은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군을 상대로 결사적인 항전을 벌여 끝내 이날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그러나 31일 새벽 2시 30분, 서문 밖에서 신 호탄이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는 기병대 폭파반을 동문[조 양문(朝陽門)]으로 접근시켜 성문폭파작전을 감행, 굉음과 함께 견고하던 동문이 뚫리고 말 았다. 이와 동시에 일군 보병대, 헌병대, 경찰대가 뒤이어 성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이때 성루로부터 총포탄이 비오듯이 쏟아져 일군은 순식간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뒤이 어 북문도 폭파되고 일군들이 한꺼번에 성안으로 돌진해옴에 미쳐 의병들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더 이상 항전할 의욕을 잃고 사산하고 말았다. 새벽 4시경 홍주성은 완전히 적의 수 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날의 홍주성 공방전에서 의병측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뒤 충남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된 윤시영(尹始永)이 보고해온 바에 따르면, 전망자는 참모 채광묵, 운량관 성재평(成載 平) 이하 총 83명으로 남자가 79명, 여자가 4명이라 하였다. 또한 참모장 윤석봉 이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