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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3. 후기의병 민종식(閔宗植) 1895년 을미홍주의병의 항일전통을 계승해 1906년에 일어난 병오홍주의병은 최익현의 태 인의병과 함께 을사5조약 늑결을 계기로 전국에서 봉기한 을사·병오의병 가운데 가장 두드 러진 의병이다.1) 홍주의병은 특히 충청도의 군사, 문화적 요충지인 홍주성을 점령, 을사의 병의 항전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의 치열한 접전으로 기록되는 홍주성 공방전을 처절히 전개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홍주의병을 이끈 주역이 바로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정산(定山) 에 퇴거해 있던 민종식이다. 민종식(자(字) : 윤조(允朝))은 원래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본향인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그는 1861년 여주군 금내면에서 판서 민영상(閔泳商)의 맏아들로 태어나 유년시절을 이곳 에 보냈던 것이다. 그가 뒷날 정산으로 이거하게된 연유는 아버지 민영상이 일찍이 충청감 사로 다년간 재직하면서 이곳에다 기반을 닦게 된 데에서 유래한다. 민종식의 집안은 명성황후 민비와 일족으로 명망있던 세도가였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부 터 유복한 환경에서 순탄하게 자랐고, 20세가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 출세의 길이 트였다. 그리하여 그는 약관의 나이로 이조참판에까지 오르는 등 전도가 유망한 관인으로 지목되었 다. 그러나, 1895년 민비가 일인 낭인들의 손에 무참히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35 세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일찍부터 이거해 있던 충남 정산군 천장리(天庄里 ; 금(今), 청 양군 정산면 천장리) 향리로 내려가 은둔하고 말았다. 정산에서 우국의 나날을 보내던 민종식은 부근 고을의 지사들과 교유하면서 뒷날의 유사 시를 대비하였다. 그뒤 일제는 한국침략을 본격화해서 1905년에는 을사오조약이 늑결되었 다. 이제 한국은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민종식은 소식을 듣고 평소 의 지우들인 김복한(金福漢), 김상덕(金商悳), 이설 등과 같이 상소를 올려 조약 폐기를 관 철코자 하였다.2) 그러나, 중앙 정부가 이미 자주성을 상실한 속에서 그들의 요구는 수용될 수가 없었다. 이에 민종식은 구국의 대의를 펴기 위해 의병항전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여러 지사들과 함께 구체적인 거의방략을 수립하였다. 이 즈음 광무황제로부터 의병구국전을 펴 달라는 밀 조가 내려와 거의 결심을 한층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3) 민종식은 1906년 초봄부터 처남되는 이용규(李容珪)를 비롯해 이세영(李世永), 채광묵(蔡 光默) 등의 의사들과 함께 거사계획을 세우고 전답을 팔아 군비를 갖추는 등 준비를 갖춘 다음 5월 11일에 이용규, 김광우(金光祐), 조희수(趙羲洙), 정재호(鄭在鎬), 황영수(黃英秀), 이세영(李世永), 이상구(李相龜) 등 각처의 지사들과 홍산(鴻山)에서 회동하여 드디어 창의 구국의 의리를 구현시키고자 거의하였다. 민종식 의병은 홍주성 점령을 목표로 삼고 곧 행군을 개시하여 판교(板橋)를 지나 서천에 당도하여 의진에 저항하는 군수 이종석(李種錫)을 감금하고 무기고를 점령, 총포와 탄약을 접수하여 전력을 강화한 뒤 다시 비인(庇仁), 웅천(熊川) 방면으로 행군해 나갔다. 5월 14일 에는 남포(藍浦)에 당도하여 역시 군수 서상희(徐相喜)를 감금하고 병력을 증강시켰다. 남포 에서는 4일간 유진하였다. 그곳에서는 우국지사로 이름높던 보령(保寧)의 유준근(柳濬根)이 병구(病軀)를 이끌고 의진에 합류해와 군사들의 사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민종식 의병은 남포에서 다시 보령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일박한 뒤 5월 19일 홍주성 외 곽의 월산(月山) 아래 금마평(金馬坪)에 당도하여 유진한 뒤 곧바로 공성전에 들어갔다. 이 때 의병 총원이 약 6백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4) 의병들은 대포 2문을 동원, 이를 앞세우고 맹렬한 공격을 가한 뒤 두 부대로 나뉘어 동문과 서문을 집중 공략하였다. 성벽에 의지하여 저항을 시도하던 성안의 적군은 의병측에서 왕성한 사기로 맹렬한 공격을 가해 옴에 미쳐 일인거류민들을 데리고 북문으로 탈출, 덕산 방면으로 퇴각하고, 홍주성은 드디어 의병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의병측의 이와 같은 공성전의 경과를 일제측 자료에서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어 민종식 의병의 의기충천하던 모습을 입증하고 있다. 의병은 한국 대포 2문과 신식 소총 약간을 가진 듯하다. 이처럼 약 한 시간 동안 교전한 뒤 의병은 2대(二隊)로 나뉘어 각기 서문과 동문을 향하고 있었다. 청양에서 약 1백여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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