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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입지 않고 태평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가.13) 홍천을 점령한 민긍호 의병은 지속적인 항전을 위해 횡성 갑천(甲川)지역과 횡성 동북방 25km 지점에 위치한 봉복산(鳳腹山)의 봉복사(鳳腹寺)를 근거지로 삼아 군량을 비축하고 병 력을 증모하여 전력을 강화시켜 갔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원주의 일군수비대는 보병 2개 소대와 기관총 2정으로써 봉복사 부근의 민긍호 의병을 공격하였다. 민긍호 의병은 9월 23일 갑천에서 이들과 조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일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하였으나, 민긍호 의병도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피해를 보고 봉복 사를 떠나 홍천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일군은 이때 봉복사를 소각하는 만행을 저지른 다음 원주로 되돌아 갔다.14) 봉복사의 근거지를 상실한 민긍호는 홍천을 중심으로 지평의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루어 횡성, 양덕원 일대에서 일군과 치열한 접전을 거듭하였다. 그뒤 민긍호는 서울 진공을 위해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결성될 때 강원도 방면의 의병을 총괄하는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임명되어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라는 총대 장 이인영의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강원도 각지에 격문을 띄워 애국혈전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 가운데 일제 정탐에 의해 동해안의 양양(襄陽)에서 수합된 격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각 면, 리장은 그 촌내의 장정 20세로부터 50세까지의 자(者)를 소집하여 각자 10일분 의 양식을 휴대케 하여 11월 25일 서울 동대문 밖 10리(里) 되는 앞뜰에 집합시키도록 하 라. 만약 이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의병을 직파(直派)하여 그에 상당하는 처분을 내릴 것 이다.15) 그러나 민긍호는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합세할 수가 없었다. 양주에 집결시킬 군사 들을 모집하기 위해 각지를 전전하던 중 1908년 1월 2일 양구 입구의 임당(林塘)에서 양구 일군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전력에 큰 손상을 초래해 부득이 홍천으로 남하하고 말았던 것이 다. 그는 이곳에서 부대를 재정비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16) 2월 22일 민긍호는 원주에 도착한 선유사 박선빈(朴善斌)으로부터 원주 동쪽 치악산(雉 岳山)의 석경사(石逕寺)에서 회견을 갖자는 전갈을 받았다. 이러한 제안을 수락한 그는 겨우 80여 명의 병력만 거느린 채 석경사로 향하다 29일에 원주 동쪽 16km되는 영월군(寧越郡 ) 수주면(水周面) 강림(講林)의 박달산(朴達山)에서 미리 잠복중이던 충주일군수비대와 불의에 조우전을 벌이다 피체, 순국하고 말았다. 이날은 폭우, 폭설의 진눈깨비가 휘날렸다. 이러한 악천후 속에서도 의병들은 3시간 3 0 분 동안이나 치열한 항전을 벌였으나, 탄약 고갈로 끝내 패해 민긍호는 일군에게 생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피체되는 순간 의병들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 필사적인 공격을 가하게 되자, 일군은 민긍호가 탈출할 것을 두려워해 의병과 교전 중에 그를 살해했던 것이다.17 ) 민긍호의 애국충정에는 일인들조차도 감복하였다고 한다. 그를 살해한 일인들은 그를 의인 이라고 하여 장사지낸 뒤 '의병대장 민긍호지묘(義兵大將閔肯鎬之墓), 라는 묘표까지 세워 주었다는 것이다.18) 민긍호가 순국한 뒤 그의 부하 김치영(金致永), 한상렬(韓相烈) 등이 잔여 의병들을 규 합, 대장 민긍호의 복수를 절규하며 4월 20일경 횡성일군수비대를 기습하는 등 그의 항전 의지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의병항전의 대국으로 보아 민긍호의 순국 이후 강원 지역에서 의 항전은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다. 이러한 점은 일제의 기록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 다. 민긍호가 죽은 뒤 적(의병)의 기세는 갑자기 쇠약해지고 반면에 수비대(일군)의 활동이 왕 성하여 토벌을 계속하였으므로 사방의 폭도(의병)는 사산(四散), 잠복(潛伏), 혹은 귀순(歸 順)하여 다시는 폭도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19) 각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