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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 인들을 처단한 다음 16일에는 다시 충주로부터 파견된 일군 전신보호병(電信保護兵)을 장호 원에서 습격, 그중 2명을 사살하였다. 또, 18일에는 150여명의 의병이 장호원에서 충주로 가던 일제 증원군을 공격하는 등10) 장호원을 중심으로 커다란 활약을 보여 일군을 전율케 했다. 한편, 의병항전이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게 되자, 일제통감부는 순종으로 하 여금 선유사(宣諭使)를 각처에 파견, 의병부대를 해산시키도록 강요하였다. 이때 민긍호는 강원도 선유사로 파견된 최상륜(崔相崙)을 부대로 초치, 의로 준책(峻責), 이를 물리쳤 다.11) 그후 8월 20일에도 3백여 명의 의병이 장호원 동남방 10여 리 되는 마을에서 일군 양말 (糧 ) 호위병을 포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23일에는 의병 80여 명이 충주에서 서울로 향하던, 도강(渡江)중인 일군을 여주 하류 이포(梨浦) 근처에서 만나 집중사격을 가한 뒤 이 들이 뭍으로 올라오자 육박전을 벌여 물리쳤던 것이다. 8월 중순경 민긍호 의병은 이강년 의병과 연합, 충주 공략에 나섰다. 관찰부(觀察府)가 있던 충주는 호서(湖西)의 중앙으로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의병의 활동거점을 확 보하기 위해 그들은 이곳을 공략키로 작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민긍호 의병은 제천-주포(周浦)를 거쳐 충주로 진격하고, 이강년 의병은 제천 -청풍을 지나 충주로 진격한 뒤, 각각 충주의 우측과 좌측에서 양면공격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무렵 충주에는 일본군 수비대 1개 소대병력이 상주하는 밖에도 얼마전에 1개소 대병력이 증파되어 2개 소대가 성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포를 떠나 충주로 향하던 민긍호 의병은 불행히도 중도에 박달재 부근에서 일 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느라 충주 공략에 나설 수가 없었다. 결국 이강년 의병은 충주 공 략에 실패, 단양을 거쳐 영남의 풍기로 들어가고 말았다. 한편, 민긍호 의병과 교전을 벌였 던 족달(足達) 중좌가 인솔하는 일군은 이튿날 제천으로 들어가 시가를 완전히 소각시켜 버 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주민들이 의병을 비호하는 경향이 있어 장래의 화근을 제거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위 황국정신(皇國精神)으로 무장된 '황군'(皇軍)의 야수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전후해 그 부근을 여행했던 영국 신문 (Daily Mail)의 특파원 맥켄지 (F.A. Mckenzie)는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에서 그때의 참상을 다 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해 놓았다.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볕이 따가운 초가을이었다. 마을을 내려다 보는 언덕위에서, 펄 럭이는 일장기는 눈부신 햇볕으로 선명했고 보초의 총검도 햇빛에 반짝였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 다녔다. 그처럼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본 일이 없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분주하고 번창했던 도시가 지금은 새까만 먼지와 잿더미로 화해 버렸다. 벽 하나 기둥 하나 장독 하나도 온전히 남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12) 민긍호 의병이 뒤늦게 충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강년 의병이 충주 공략에 실패하고 영남으 로 남하한 뒤였다. 이에 단독으로 충주성 공략을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 았다. 이 즈음 일군사령부가 서울로부터 증원군을 파견, 의병의 활동이 왕성하던 원주, 제천 , 충주 일대의 의병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되자 민긍호 의병은 그들의 '토벌구역 ' 을 벗어나 홍천(洪川)으로 북상, 새로운 항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07년 9월 10일 홍천을 장악한 민긍호는 해산군인 250여명을 주축으로 한 400여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횡성, 양덕원, 춘천 등지에까지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일제의 조종을 받은 정부에서는 10월에 홍우철(洪祐哲)을 강원도 선유사로 보내어 민긍호를 회유하려 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 황철(黃 )도 횡성군수 심흥택(沈興澤)을 10월 과 11월에 걸쳐 두차례나 민긍호에게 보내어 의병해산을 종용하였다. 민긍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 이러한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긍호는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은 사람으로 어찌 저 오랑캐에 대해 복수하고 싶지 않겠 는가. 또 교시(해산권유문) 속에 '전국의 인민이 해를 입지 않음이 없어 촌락이 불타고 남녀 가 이산되는 것이 과연 누구 때문인가'라고 하여 우리 의병에게 허물을 돌렸으나, 이는 각 하(관찰사)가 그 지엽만을 말하고 그 근본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저 왜노(倭虜)들의 무도 (無道)함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의병을 일으켰겠는가. (중략) 대저 의병과 왜병이 교전함 에 형세는 진실로 그러하지만, 왜노가 무고한 마을과 읍부(邑府)를 송두리째 불태우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사에서인가. 각하(관찰사)는 의병만 해산되면 우리 국민이 저 왜노의 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