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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 봉기 이튿날에는 원주 본대의 봉기 소식을 들은 여주분대의 군사들도 죽음을 같이할 것을 맹세하고 일제히 원주 본대로 합류해와 봉기군의 사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한편, 원주 진위 대의 봉기 소식을 접한 일군 사령부는 충주경찰고문지부(忠州警察顧問支部)로 하여금 원주 에 정찰대를 파견, 상황을 파악토록 조처하였다. 이에 따라 충주수비대장 이궁(二宮) 소위는 부하 19명을 이끌고 그날 오후 3시경 잠입하려 하였으나, 민긍호가 인솔하는 봉기군에게 들켜 2시간여의 교전 끝에 일인 거류민들과 경무관 5명을 데리고 충주로 패퇴당하고 말았 다.4)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일군사령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날(6일)로 서울 주둔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하림(下林) 소좌를 지휘관으로 삼아 보병 2개 중대, 기관총 4정 , 공병 1개 소대로 한 부대를 편성, 원주로 급파시켰다. 그러나, 이 부대가 지평(砥平)을 거쳐 10일 원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를 미리 탐지한 봉기군이 원주를 철수한 뒤였다. 이에 그들 은 원주 부근을 샅샅히 수색해 보았으나, 봉기군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그 원인에 대해 그들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지형에 밝은 그곳 주민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폭도(의병)의 첩보근무는 대단히 민활, 교 묘하고, 우리의 행동을 탐지한 뒤 은현출몰(隱現出沒)하기 때문에 아대(我隊)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의 소탕에 노력하였으나 수일간 조금도 얻는 바가 없었다.5) 이를 보면 이때 지방민들이 의병과 한 몸이 되어 항일구국 대열의 일원으로 얼마나 큰 활약을 보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 동안 봉기군은 거사일부터 인근 각지에 격문을 돌려 주민들의 호응을 호소하는 한편 , 근처의 포군(砲軍)들을 포섭하면서 전열을 정비한 뒤 새로운 대일항전을 위해 8월 8일경 2 개의 부대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지역을 향해 원주를 떠났다. 그러므로 하림 소좌가 이끄는 일군이 원주에 도착했을 때는 텅빈 시가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6) 이와 같이 의병으로 전환된 원주 봉기군의 총대장이 되어 항일전을 지휘한 민긍호(閔肯 鎬)는 이강년(李康秊)과 함께 강원도 지역에서 봉기한 정미(丁未)의병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 러진 활약을 보였던 의병장으로 기록 되고 있다. 민긍호(閔肯鎬)는 세도가문이던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일족으로 원래 서울 출신이다. 광무 원년(1897)경 진위대에 들어가 문경, 풍기, 간성, 고성 등지의 진위대 분견대에서 근무한 다음 춘천분견대로 전입된 1900년 무렵 정교(正校)로 승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오늘 날의 준위(準尉)에 해당되는 특무정교(特務正校)로 승진, 곧바로 원주 본대로 들어와 군대해 산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7) 원주에서 철수한 뒤 평창으로 이동한 봉기군은 두 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는 김덕제의 지 휘하에 강원도 지방으로 들어가 강릉, 양양, 간성, 통천 방면으로 진군, 항일전을 펼쳐 나갔 고, 다른 한 부대는 민긍호의 지휘하에 제천, 충주, 여주, 홍천 방면으로 이동하며 각지에서 봉기한 여러 의병부대와 연합하면서 새로운 항일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민긍호는 대규모의 의병부대를 몇 개의 소규모 의병부대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보다 효 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는 데에는 신속한 이동이 가능한 소수의 의병부대로 게릴라전을 펼 치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부대는 평창을 떠나 주천(酒泉)으로 이동하였다. 제천을 공략하기 위해서 이다. 그곳에서 이 부대는 재기한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와 조우,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강년은 을미의병 때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 큰 활약을 한 뒤 이때까지 은둔생활 을 하면서 재기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소 식을 듣고는 제천 북방의 배양산(培陽山)에서 재기한 뒤 곧바로 제천에 무혈로 입성하였다 . 이와 전후하여 민긍호 의병은 주천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와 합류하기에 이른 것이다.8) 한편, 약 200명으로 구성된 민긍호 휘하의 또 다른 한 부대는 8월 12일 여주를 기습 , 경무분견소(警務分遣所)를 포위공격, 일경(日警)과 그 가족들을 처단한 뒤 무기를 노획하였 다. 이즈음 인근 각지로부터 의병에 자원하는 자가 쇄도해와 음죽(陰竹), 장호원(長湖院)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원주에 파견된 일제 '토벌군'은 이 러한 정보를 전혀 얻을 수가 없어 속수무책이었다.9) 뒤이어 이들은 서쪽으로 이동, 300여명의 민긍호 의병이 15일 죽산(竹山)을 기습하여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