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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68 100 5164 30 전투공보, 조선최근사 70 104 600 4 21조선폭도토벌지 100 - - 30 - 속음청사 68 100 516 4 21 일본공사관기록 - - -사상 42 일본외무성 및 육해군성 문서 (《독립운동사 1》, p.466) 16) 송상도(宋相燾) : 앞의 책, p.121. 17) 황현(黃玹) : 《매천야록(梅泉野錄)》, p.427. 18) 송상도(宋相燾) : 앞의 책, p.121. 원주진위대의 봉기와 민긍호(閔肯鎬)의 의병항전 1907년 8월 1일에 일어난 서울 시위대의 해산과 시위대 군사들의 대일항전 소식은 순식 간에 각 지방으로 전파되어 진위대 군사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각처에서 한국 군의 무장봉기가 잇달아 의병의 항일전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방 진위대 가운데 가장 먼저 항일전의 가치를 든 곳은 강원도의 군사요충지 원주(原州) 에서였다. 원주진위대의 봉기는 서울 시위대의 경우와는 달리 비교적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 어졌다. 일제의 계획에 따르면 원주의 제5진위대대의 해산 예정일은 8월 10일이었다.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은 진위대 해산에 따른 제반사항을 시달받기 위해 소집명령을 받 고 8월 2일 상경하였다. 이 즈음 원주 진위대의 군사들도 군대해산의 소문을 듣고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 올라 있었다. 홍대대장은 이와 같은 군사들의 동요를 막는데 급급해 하던 중 소집명령을 받고 상경하였던 것이다.1) 이 틈을 타 특무정교(特務正校 ; 현재의 준위 계급) 민긍호(閔肯鎬)는, 임시로 대대장을 대리하고 있던 정위(正尉) 김덕제(金悳濟)와 함께 미리 세워놓은 계획대로 군사들을 규합, 무장봉기하였다. 곧 8월 5일 하오 250여명의 진위대 군사들은, 서울 시위대 군사들이 함몰(陷沒)하였은즉 우리도 이 환(患)을 당할 터인데,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라고 외치면서 두 사람의 지휘하에 타종을 신호로 일제히 봉기, 무기고를 장악해 1천 2백여 정의 소총과 4만발의 탄환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당시 봉기 군사들에게 감금당한 6명의 장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권태희(權泰熙 : 정위 (正尉))는 후일 군법회의에서 이때의 봉기상황을 아래와 같이 진술, 생생한 현장증언을 들려 주고 있다. 본인은 8월 4일에 신병으로 사저로 돌아가 휴양하고 있었더니, 이튿날(5일) 오후에 본대 로부터 함성과 포성이 크게 일어나고 부하인민들이 분답피란(奔踏避亂)함에 그 이유를 알아 본즉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장교를 구타한다 하는 고로 민가에 피신해 있다가 다음날 시 민들에게 잡혀 병영에 들어가 보니 병사(兵舍)와 군기고(軍器庫)가 부서져 형체도 없고 사병 은 사방에 흩어져 시민들과 합세해서 본인을 병사(兵舍)에 이틀 동안 감금하였다.2) 이처럼 원주진위대 군사들은 봉기 후 즉시 이에 호응하는 그곳 시민들과 합세, 나머지 무 기들을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대를 재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위대군 250여명을 주축 으로 한 천여 명의 원주 봉기군은 4개 부대로 편성되어 민긍호, 김덕제, 손재규(孫在奎), 한 갑복(韓甲復) 등의 지휘하에 원주읍내의 우편취급소, 군아, 경찰분소 등의 관공서와 일인들 을 습격, 타격을 가하고 원주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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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진위대의 봉기와 민긍호의 의병항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