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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위, 공격토록 하였다.   일본군 제12중대가 미미(梶尾) 대위의 선두 지휘하에 영내 진입을 시도해 오자, 시위대는 막사 창문을 통해 이들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어 미미대위를 비롯한 많은 일군을 사살하는 전 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처럼 용감한 항전을 벌이던 시위대 병사들도 점차 탄약이 떨어져 사격에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군의 공격은 점점 치열해져 갔으며, 더욱이 이때 일군이 투척한 폭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일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틈을 타 일군이 대 거 영내로 난입하자, 시위대 병사들도 부득이 영정(營庭)으로 나와 일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여 상호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가 불리하게 되어 시위대 병사들은 10시 50분경 눈물을 머금고 병영을 포기한 채 서소문 밖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 13)   한편,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오전 10시경 정문을 향해 공격해 오는 일군 제5 5 연대 제3대대 제10중대를 맞아 치열한 교전을 벌여 그들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이에 병사 들의 사기는 더욱 양양되어 갔다 그뒤 일군은 몇 차례에 걸쳐 좁은 골목을 따라 공격을 감 행해 왔지만, 그때마다 시위대 병사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패퇴하고 말았다. 오전 10시 50분, 즉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이 병영을 물러설 무렵 일군은 제7중대와 공병 1개 분대의 증원군을 보내어 새로운 돌격전을 시도하였다. 이때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11시 40분경까지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하다가 병영에서 철수하였던 것이다.14)   이 날의 전투에서 양측이 입은 피해 상황을 보면, 각자의 입장에 따라 그리고 자료에 따 라 수치가 각기 다르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일군측은 42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시위 대측은 68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탄약 고갈로 516명이 포로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일본군은 소총 7,216발, 기관총탄 1,138발, 야포탄 8발, 황색 화 약 1.5kg을 소모한 끝에 '진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15)   그리고, 이 날의 항전은 시위대 병사만의 고립된 것이 아니었다. 상인, 노동자, 학생 등 각계각층의 서울시민 남녀노소가 합심해서 시위대의 항전을 도왔던 것이다. 시위대 부상병 이 제중원(濟衆院)으로 호송되자, 나이어린 연지여중학교(蓮池女中學校) 학생들은 "저 동포 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데, 우리들이 비록 여자이나 의로써 저들은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정성껏 이들을 간호하기도 하였다.16)   병영에서 물러난 시위대 병사들은 서소문을 빠져나와 남대문 정거장을 수비하던 일군과 다시 30여분간 교전한 뒤, 각기 사방으로 흩어져 의병의 대열에 들어가 지속적인 항일전을 펼치게 된다. 따라서 황현(黃玹)도 그의 명저《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성외로 달아난 자 는 모두 의병에 합류했다(기직주성외자(其直走城外者) 개전여의병합(皆全與義兵合))"라고 이 점을 지적하였고, 또한 송상도(宋相燾)도 그의 역저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남은 군대 는 각자 흩어졌으며 팔도에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재기하게 되는 것은 이로써이다(여군(餘 軍) 각자산거(各自散去) 정미팔로의려지갱기급이차야(丁未八路義旅之更起及以此也)"18)고 하 여 해산군인의 항전이 의병 재봉기의 실마리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경운궁 부근의 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