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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거부하고 무장봉기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이 일군과 교전을 벌 였던 것이다.   오전 10시로 예정된 해산식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거행되었다. 이때 강제동원 된 인원은 1,812명에 불과해, 총 해산인원 3,441명에 1,629명이 부족한 가운데 진행되었 다. 이들 불참 병사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무장봉기한 것이다.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해산명령이 내려져 한국군들은 차고 있던 칼과 어깨에 단 견장(肩章)을 해제당하고, 미리 준비된 은금이 이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자유해산이 명해졌다. 순간 이들은 울분을 억제 할 수가 없어 땅을 치고 통곡하기도 하고 은금을 내던지며 일제와 매국노들을 성토해 해산 식장은 일대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이 날의 처참한 해산 광경을 그의 《한국통사》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날 하늘은 흐리고 보슬비가 소소히 내리고 있었다. 아, 훈련원은 국가 5백년 동안 무 예를 닦던 곳이요. 현재의 군인들 또한 다년간 용약(踊躍)하며 무예를 익히던 곳인데, 갑자 기 오늘부터 헤어져야 하니, 하늘인들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7)   이 날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및 제2연대 제2대대 병사들은 해산을 거부한 채 일제히 무 장봉기, 일제 군경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함으로써, 한국군의 호국애족의 전통을 세워 놓 았다.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朴昇煥)8)의 자결이 바로 그 계기가 되었던 것 이다.   박승환은 민비시해사건 이후 '국수'(國讐)를 갚을 생각을 잊지 않고 지내던 중 일제의 국 권 침략이 점차 노골화되자, 죽음으로 이를 저지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 그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때 휘하 군인을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일제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혹 화가 황제에게 미칠까 염려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9) 그리하여 울분의 시간을 보내던 중 8 월 1일 아침 일군사령관 관저로 모이라는 긴급소집 연락을 받게 되자, 박승환은 병을 핑계 하고 중대장 사재흡(舍在洽)을 대리로 참석케 했다. 귀대한 사재흡의 보고를 통해 군대해산 이 단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승환은 부하들에게 총기를 무기고에 반납하도록 지시한 뒤, 책상을 치면서 울부짖고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 채 권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무엇 이 아깝겠는가.10) 이때 총성을 듣고 뛰어 들어간 당번병이 박승환의 자결을 목격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 대장자문"(大隊將自刎)이라고 크게 외쳤다. 중대장 최우상(崔禹相 : 정위), 안봉수(安鳳洙 : 부위), 신보균(申普均 : 참위) 등이 급히 대대장실로 뛰어 들어가자, 사병들은 비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무기고로 몰려가 문을 부수고 총기와 탄약을 되찾은 뒤 배속 일군 교관 율원(栗原) 대위와 그 기병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시위 제1연대 제 1 대대 병사 591명은 전원 재무장하고 일군과 교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박승환 대대와 인접한 제2연대 제1대대에서도 훈련원으로 출발하려던 중 이웃대대 로부터 요란한 총소리와 함성이 들려오자,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때 박승환 대대 병졸 3명이 총을 쏘면서 달려와,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우리 대대장은 이미 죽었다.11) 라고 크게 소리쳤다. 이 소리에 제2연대 제1대대 병사 591명 전원도 일제히 무기고로 달려 가 총기를 되찾은 뒤 무장봉기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놀란 배속 일군 교관 지(池)대위는 급히 남문으로 도망쳤다.12)   이처럼 박승환의 자결이 도화선이 되어 양시위대대가 봉기할 무렵, 일군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제9, 10중대의 각 1소대는 양대대의 병영을 접수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양시위대 병사들은 영문 밖으로 나와 그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하며 일군의 접근을 봉 쇄시켰다. 얼마 뒤 일군은 제3대대 제10중대 병력 전원을 투입해 시위대의 봉기를 진압하 려 하였으나, 이들도 역시 의기충천한 한국군의 공격에 피해만 늘어갈 뿐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일제의 강기(岡崎) 제13사단장은 드디어 대병력의 투입을 결정 하였다. 이에 따라 오전 10시 20분 판부(坂部) 소좌가 인솔하는 일군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제3대대 제9중대와 증강된 공병대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의 후문을 공격해 왔다. 또한 기 관총 2정을 남대문 벽루에 고정시켜 원거리 사격으로 그들의 공격을 엄호케 하였다. 그러 나, 시위대 병사들은 동요하지 않고 막사 속에서 견고한 건물벽을 엄폐물로 삼아 공격해 오 는 적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에 판부(坂部) 소좌는 10시 40분 경 다시 제12중대를 증원시켜 제9중대와 함께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영을 삼면에서 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