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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용한 서학 등으로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직접 목도하고 위척존양(衛斥尊攘)의 정신 무장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4)    그뒤 쇄국정책을 견지하던 대원군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1876년 조선은 일제의 강 압으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일제는 이로써 조선침략의 중요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 조약 체결 때 양국 대표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유인석을 비롯한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은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반대, 위정척사를 지키려는 쇄국을 주청하였다.5) 결국 이 주청은 묵살되 어 조약은 체결되고 말았지만, 그들은 이 상소에서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 침 략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어 시대착오적 고루한 주장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유인석은 1893년 향리인 춘천의 가정(柯亭)을 떠나 제천 장담(長潭: 충북 제원군 봉양면 공전리)6)으로 옮아갔다. 양가의 재당숙인 유중교가 1888년 춘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거해 강학(講學)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던중 1893년 작고하자, 유중교의 유업을 잇기 위해 이거해 온 것이다. 유인석은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얼마 뒤 바로 이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무렵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한편, 김홍집(金弘集)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軍 國機務處)를 설치케 해서 그들 의도에 맞는 조선의 내정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갑오개혁이라 불리우는 이때의 개혁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서양 식 복제로 개정케 한 변복령(變服令)은 유생들을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다. 유인석도 이 러한 의제개혁을 다음과 같이 통렬히 비판하였다.    아, 슬프도다. 4천년 화하정맥(華夏正脈)과 2천년 공맹대도(孔孟大道)와 조선 5백년 예 악전형(禮樂典型)과 가가수십세(家家數十世) 관상법도(冠裳法度)가 이제 끊어졌도다. 글읽 는 선비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겠는가. (중략) 이변복(變服)은 천지, 성현, 선왕, 부조(父 祖)에 죄를 짓는것이라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요. 이제 성토(聲討)하다 죽고 거의(擧義)하다 죽으리니, 선왕의 도를 지키다 죽는것은 선비의 의리이다.7)   이와 같은 분위기 아래에서 일제는 그들의 조선 침략정책을 수행해 가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 국모(國母)인 민비(閔妃)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건양(建陽) 원년 1월 1일로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바 꿈과 동시에 성인 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斷髮令)을 내렸다. 바로 이와 같은 사건 들이 의병항전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유인석의 의병항전은, 을미변복령이 내려진 직후 이 '변고(變故)'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 을 논의하기 위해 1895년 윤 5월 2∼3일 양일간에 원근의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명을 모 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講習禮)와 향음례(鄕飮禮)8)를 거행한 것에서부터 유래한 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이 행사는 이후 11월 거의 직전까지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곧 의병항전의 준비단계였으며 후일의 거의(擧義)에서도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9)    이때 열린 향음례, 강습례에서 유인석은 당시와 같은 '만고소무지대변(萬古所無之大變 )' 에 정당하게 처신할 수 있는 다음의 세 가지 행동방안, 곧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 다. 1. 거의소청(擧義掃淸) :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안 2. 거지수구(去之守舊) : 국외로 망명해서 대의(大義)를 지키자는 안 3. 자정치명(自靖致命) : 의리(義理)를 간직한 채 치명(致命)하는 안 이러한 행동강령에 따라서 이필희(李弼熙)와 안승우(安承禹)는 거의를 주장했고, 양두환(梁 斗煥) 이하 몇 사람이 자정을 결심했으며, 주용규(朱庸奎), 오인영(吳寅永), 박정수(朴貞洙) , 이조승(李肇承), 이정규(李正奎) 등은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로 들어가 수의하기로 결심하였 다. 유인석이 이때 적극적인 행동방안인 거의나 자정을 택하지 않고 거수(去守)를 결심한 이유는 당시 그가 양모(養母)인 덕수(德水) 이씨의 상중에 있어 처신에 일정한 제약이 가해 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10)   유인석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陳)은 먼저 이와 같이 향음례와 강습례에 회집하였던 그의 문인들의 거의에서부터 유래하였다. 즉 그의 문인들인 괴은(槐隱) 이춘영(李春永)과 하사(下 沙) 안승우(安承禹)가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1896년 1월 12일 김백선(金伯先)의 포군(砲軍 ) 을 주축으로 의진(義陳)을 결성한 뒤 제천으로 진군,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몰아냈다. 이것 이 호좌의 병진의 발단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제천에서 서상렬, 이필희, 신지수(申芝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