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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2. 군대해산과 의병 군대해산과 박승환(朴昇煥)의 자결 근대의병사(近代義兵史)는 크게 보아 1907년을 전환점으로 전, 후기로 양분하여 볼 수 있 다. 전기의병에서는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유린하며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련 의 사건, 즉, 청일전쟁의 도발과 그를 이은 민비시해사건 및 단발령(斷髮令), 그리고 러일전 쟁의 도발과 그를 이은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의 늑결(勒結) 등을 계기로 해서 애국애족(愛 國愛族), 배외항일(排外抗日)의 정신에 투철한 민간인들만이 항전의 대열에 나선 까닭에 무 기와 편제가 조악(粗惡)해 그 성세에 비해서 실제적인 전과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러 나, 1907년 이후에 전개된 후기의병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한 변화는 바로 그해 8월 일제에 의해 억지로 단행된 한국군대의 해산에 기인한다. 즉 군대해산의 결과 투철한 민족의식과 강한 배일정신으로 무장된 해산군인들이 각처로 흩 어져 이미 활동중이던 의병부대에 합류하거나 새로 의병부대를 편성,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정예화된 의병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한 까닭에 침략자에게 보다 큰 타격을 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대해산은 대일전면전으로 의병항전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의병항전의 주도, 참여계층도 신분, 직업에 관계없이 다향해졌으며 거의 전 국 방방곡곡에 걸쳐 거의(擧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군대해산은 근대의병사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이룩한 일대사건이다.   군대 해산은 한국병탄을 위한 일제의 일관된 시책의 막바지 조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한국군대는 일제를 위시해 청국, 러시아 등 열강 세력의 부침(浮沈)에 따라 그들의 기호에 맞게 수차 개편되는 비운을 겪었고, 1894년 이후에는 일제의 보다 적극적인 대한침략의 결 과 군비축소가 이루어져 근대적 강병의 양성은 쉽지 않았다. 특히 러일전쟁 발발 직후 단행 한 군액(軍額)의 반감(半減)도 한국군 전력의 무력화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므로 1907년 해산 직전의 한국군의 현황은 서울에 시위혼성여단(侍衛混成旅團)의 제1, 제2 보병연대(步 兵聯隊) 약 5천 명과 기병(騎兵), 공병(工兵), 포병(砲兵) 각 1개 중대가 있었으며, 지방에는 수원, 청주, 대구, 광주, 원주, 해주, 평양, 북청 등지에 8개 진위보병대대(鎭衛步兵大隊) 약 2천여 명이 배치되어 있어 불과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에 불과하였다.1)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나, 근대식 무비(武備)를 갖춘 이 한국군대는 일제에게 위협적인 존 재로 느껴졌다. 서울의 시위대는 평소 병사 1인당 15∼30발의 실탄을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전군에 지급된 총탄은 적어도 10만발 이상에 달해 일제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짐이 바로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때 나타났다. 즉 이에 앞서 헤이그 밀사 파견의 여파로 인해 7월 20일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하게 되자, 19, 20 양일간에 걸쳐 광무 황제퇴위에 반대하는 서울 시민들의 시위에 호응해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 등 일부 시 위대 병사들도 무장봉기, 일제 군경과 직접 교전을 벌였다. 이것이 한국군의 대일항전의 서 장이 된 것이다. 또한 이로써 한국군의 존재는 한국병탄을 눈앞에 둔 일제에게 커다란 위협 으로 작용해, 일제는 군대해산 방침을 서둘러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퇴위시킨 여세를 몰아 1907년 7월 24일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 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늑결함과 동시에 군대해산 등을 포함한 비밀각서를 교환 하였다. 즉 비밀각서 속에는 조약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황궁 시위를 위한 1개 대대 만 남기고 한국군을 전부 해산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군대해산 항목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극비로 취급된 이 각서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문제만큼은 한국민들 모르게 은밀히 추진하려던 일제의 심사에서였다. 그 해산안의 요지를 소개하면 다 음과 같다. 해산이유    한국 육군은 군사교육을 철저히 받지 못하고 규율도 엄하지 못해 유사시 국가의 간성(干 城)으로 신뢰할 수 없다. 이는 용병주의(傭兵主義)를 취해온 때문이므로, 장차 징병법(徵兵 法)을 시행하여 정예병을 양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의 군비(軍備)를 정비하고자 한다. 해산방법 1. 육군 1개 대대만 남겨 황궁(皇宮) 시위(侍衛)를 맡게하고 나머지는 전부 해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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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과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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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과 박승환의 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