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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의 의식세계에서 용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을 결심하 게 된다.   부모의 장례를 치른 직후인 1914년 11월 7일 김도현은 홀연히 집을 떠나 동해안의 대진 (大津)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현재 유명한 해수욕장으로 변해 있는 대진 앞바다 속으로 걸 어서 들어가 64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도해자정(蹈海自靖)에 앞서 그가 남 긴 다음과 같은 절명시는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간결히 묘사하고 있다. 오백년 선말(鮮末)에 태어난 나 붉은 피 전신에 어리어 중년의 항일 19년에 머리칼은 추상(秋霜)처럼 변했고 국망에 눈물만 하염없어라 친상(親喪)에 마음이 더욱 상하니 머나먼 바다가 보고파라 이레가 동지이니 홀로 서매 옛산만 푸르고 백계(百計)에 무일방(無一方)이라 희고 흰 저 물결이 이 내 한 몸 간직하겠구나19)   각 주 1) 김강수(金康洙) :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의 의병활동(義兵活動)>(국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pp.6∼11 참조. 안동 방면의 의병에 대한 연구가 그 동안 학계에서 미진한 가운데, 본 논문은 안동의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영양의병을 고찰함으로써 이 지역 의병의 활동상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2) 《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2》, p.17. 3) 안동의병진의 총수는 원래 권세연(權世淵)이었으나, 12월 15일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 中)이 거느리는 관군의 공격을 받아 이 의병은 패퇴하고 만다. 그뒤 각지에 사산해 있던 의 병들은 전열을 가다듬은 뒤 김도현이 안동으로 진격하기 직전 재차 안동을 점령하게 된다 . 이때 재기한 안동의병은 김도화(金道和)가 통솔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관찰사 김석중은 도망하다가 마침 이강년 의병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였다. 4) 김강수(金康壽) : 앞의 논문, p.21. 원래 선성의진의 대장은 이만도(李晩燾)였으나, 고령 (高齡)으로 물러나고 대신 그의 아들인 이중린이 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5) 원용정(元容正) : <복은(卜隱)>(《소의신편(昭義新編)》권8, 국사편찬위원회, 1975 ), p.241. 6)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 p.23∼26. 태봉전투의 경과에 대해 본 자료는 비교적 자세한 기술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7) 김강수(金康壽) : 앞의 논문, pp.22∼23. 8) 허훈은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유명한 후기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중형(仲 兄)이다. 원래 선산 출신이었으나, 1894년 갑오동학 운동이 일어날 무렵 이곳으로 이거해와 정착하게 되었다. (본서 허위(許蔿)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