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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의병을 모아 의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아우 김경옥(金景玉)을 덕천(德川)으로 보내 거의를 촉구하였으며, 그 자신도 인근 각지를 돌며 의병을 소모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영양 , 안동, 청송, 영덕, 영해 등지를 부단히 왕래하며 일군을 상대로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한편, 7월 13일(음) 김도현 의진이 영해읍으로 들어갈 무렵에 김하락(金河洛)의 광주(廣 州)의병이 영덕에서 관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영덕으로 향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도중의 웅창가(熊倉街)에 이르렀을 즈음 김하락 의진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되어 그만 귀환하고 말았다.   그뒤에도 김도현은 각지를 전전하며 의병항전을 폈지만, 인근 고을의 의병들은 모두가 해 산한 뒤였으므로 고립된 항전을 벌여야만 하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들의 항전의욕이 점차 저상되어 갔다. 이 즈음 그의 괴로운 심정은 관군측의 김장옥(金長玉)에게 주는 다음 과 같은 회신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일개 포의지사(布衣之士)로 궁벽한 곳에서 태어나 소방(疏放)한 자이나 격분을 이기 지 못해 거의하였다. (중략) 왕명을 가탁(假託)한 사신들이 사방으로 나와 모든 의진이 흩 어졌도다. 아, 이 한 몸으로 어찌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겠는가. 천신만고로 사경을 넘은 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나, 세상사를 지켜보며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지 않는 날 이 없다.13)   이리하여 김도현은 총 113 정을 비장한 뒤 1896년 10월 15일 의병을 해산하기에 이른 다. 이로써 10여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펼쳐온 그의 을미의병항전은 종식되었고, 이후 그는 다양한 형태로 항일운동을 펴 나가게 된다.   김도현은 의병을 해산한 뒤 1903년 무렵에 경북관찰사 이헌영으로부터 오읍도집강(五邑 都執綱)을 위촉받아 영양, 청송, 진보, 영덕, 영해 등 다섯 고을의 화적 토벌에 진력하였다 . 14) 을미의병 해산 이후 민심이 어지러워 도처에서 영학당(英學黨), 남학당(南學黨), 서학당 (西學黨), 동학당(東學黨), 활빈당(活貧黨) 등이 일어나 탐관오리, 부자 등을 습격하였는데 , 영양 지역에는 특히 그 빈도가 잦았다. 김도현이 임명된 오읍도집강은 이와 같은 무리들을 효유, 진무하고 치안의 기강을 확립하는 임무를 담당하던 직책이다.   그뒤 일제침략은 더욱 가중되어 1905년에는 을사오조약이 늑결되어 국망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 각계층에서 을사조약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김도현도 즉 각 상경, 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열국 공사관에도 서신을 보냈다. 만국 공법에 따라 일제의 횡포를 누르고 한국의 독립을 지켜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 그 서한의 끝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각국의 공사들께서는 너그러운 도량으로 공법을 엄히 밝혀 저 일제의 전횡을 책하시어 우리 대한의 유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42년 동안 지켜온 왕위를 보호하시어 2천만 백성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손모아 절하며 머리숙여 구구히 읍축(泣祝)하나 이다.15)   그러나, 전국민의 을사조약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에 김도현은 고향으로 내려온 뒤 사흘만인 1905년 12월 29일(음) 영양읍 장터에 다 방문을 붙이고 통문을 돌려 거의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1월 3일(음) 오읍도집강 시절 양 성한 5, 60여 명의 포군을 주축으로 1백여 명의 의병을 모아 다시 거의의 깃발을 들게 되 었다. 을미의병 해산 뒤 거의 10년만의 일이다.16)   하지만, 김도현 의진은 항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군수 이범철(李範喆)과 안동주재 일군의 출동으로 해체되었으며 그 자신도 일군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곧 대구경무국 으로 압송됨으로써 재기의 꿈은 무산되었던 것이다.17)   그뒤 감옥에서 석방된 김도현은 국망을 눈앞에 두던 1908년 6월 향리에다 신식교육기관 인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 무렵 일제가 향교(鄕校)의 재산 을 국유화하는 음모를 꾸미게 되자, 전국적으로 개화유림이 주동이 되어 향교재산을 이용해 학교를 설립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126> 일환으로 김도현도 영양에 서 송사(宋史) 조언찬(趙彦瓚) 내은(乃隱) 조인석(趙寅錫) 등과 함께 영흥학교를 세운 뒤 교 장에 취임하였던 것이다.18) 그뒤 영흥학교는 1911년 일제의 학제개편으로 폐교되면서 영 양공립보통학교(英陽公立普通學校 ; 영양국민학교의 전신)로 바뀌었다. 전통유생의 신분으로 의병항전에 투신한 뒤 이와 같이 신교육구국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경우는 흔 치 않다고 하겠다.   1895년 거의 이후 집요하게 항일구국운동을 벌여온 김도현으로서는 1910년의 국망 뒤부 터는 아무런 삶의 의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즉, 일제치하에서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