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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김도현 의병 활동도>     이와 같이 김도현이 강릉의병진으로 합류한 직후, 강릉의진은 경군(京軍)을 맞아 대공산 성(臺空山城)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화력이 월등히 우세한 경군에 밀리어 의병은 구산역(龜山驛)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김도현은 흩어지는 군사를 수습하며 분 전하였으나 끝내 전세는 기울고 말았다. 그뒤 의병은 전열을 재정비한 뒤 강릉에서 대관령 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현산성(普賢山城)에서 다시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의진은 정선, 임계(臨溪), 삼척 등지를 오가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강릉의진은 4월 19일(음력) 삼척에서 관군과 대혈전을 벌였다. 이때 김도현은 수 성장(守城將) 민동식(閔東植)과 더불어 성 안에 남았으며, 민용호는 중군장 최중봉(崔中奉 ) 이하 여러 장수들과 함께 본군을 거느리고 성 밖에 나아가 매복한 채 관군의 접근을 기다렸 다. 그리하여 매복 사실을 모르고 다가오던 관군을 의병들이 기습함으로써 처음에는 전세가 의병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전투가 계속되면서 탄약이 떨어져 의병들은 점차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의병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관군은 성 안으로 잠입, 방화하여 의진을 교란 시켰으므로 본진은 부득이 오십천(五十川)으로 퇴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도현은 성 안에 끝까지 남아 관군과 혈전을 벌였는데 탄약 부족으로 패퇴하고 말았다.11)   이 전투를 끝으로 김도현은 강릉의병과 결별하고 영양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가 강릉으로 진군할 때는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갔으나, 삼척에서 일월산(日月山)을 넘어 돌아올 때 는 10여 명의 의병만이 남고 말았다.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고향에 돌아와 보니 , 마을은 일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부친은 산중으로 피신, 구통(九通)의 송지학(宋志學)의 집에 있다가 여미동으로 옮아가 은거해 있었다.12)   그러나, 김도현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지속적인 항전을 벌여 나갔다. 그는 소청(小靑)의 검각산성(劍角山城)에 본진을 두고 면내에 통문을 돌리며